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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정림사지 석탑에 새겨진 아픈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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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0-11 22:09:47 수정 : 2019-10-11 22: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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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지난주 학과 추계 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답사 지역은 충남의 천안·공주·부여·홍성·예산 등지였다. 이중 공주와 부여는 백제의 도읍지가 있었던 곳으로 백제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은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과 더불어 백제계 석탑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성왕 때 부여로 천도한 후 세운 것으로 보이는 정림사(定林寺)는 1탑 1금당 형식의 사찰로, 현재 부여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 ‘정림사’라는 이름은 1942년 절터를 발견했을 때 ‘정림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층석탑은 잘 다듬은 149개의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8.33m에 달한다.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하면서도, 균형미와 비례감이 잘 조화된 이 석탑을 통해 백제인의 예술적 자질을 그대로 느껴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석탑의 기단부를 살펴보면 글씨가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비문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대장군 소정방이 자신의 전공을 과시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남쪽면을 제1면으로 하며, 4면에 걸쳐 내용이 실려 있다. 당나라 황제의 은혜를 찬양하고 의자왕과 왕자를 비롯해 관료 700여명을 사로잡았다는 내용과, ‘무릇 5도독(都督) 37주 250현을 두고 호 24만, 구 620만을 각각 편호(編戶)로 정리했다’는 기록에는 백제의 마지막 행정 상황이 나타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세우게 한 삼전도비(三田渡碑, 일명 대청황제공덕비)처럼 새로 비석을 만들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대당평백제국비명’과 같이 비석이 아닌 석탑의 탑신을 활용해 비문을 새겨 넣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예술사적으로 백제탑의 진수를 보여주는 정림사지 석탑에 백제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아픈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는 점도 알아두었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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