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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거절할 명분 약하고 진상규명·전쟁범죄 입증 증거”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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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8 06:00:00 수정 : 2019-09-18 1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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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희생자 유해봉환 왜 해야 하나 / 韓·日 국교수립 때 식민지배 성격 미합의 / 강제동원·위안부 피해 고통 계속 이어져 / 학계 “유해봉환 과거사 문제 해결 단초” / 日정부도 “한국 정부 요청있으면 검토” / 해방 후 50여년간 유족 동의 없이 봉환 / 노무현 정부 와서 유족이 직접 모셔와 / 사망자 존중은 인간 존엄의식과 연결 / “韓·日 얽힌 문제… 동아시아 미래와 연관 / 진실규명·책임 묻지 않고 모셔오면 안돼” / 日 변화 유도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 필요 / 2018년 7월 南·北 민화협 협력 유해봉환도 / 민화협, 3월 봉환 유골 중 세분 유족 찾아
일제강점기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가족 및 동료들과 이별을 앞두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노역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사망한 뒤에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이후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됐을 때 이춘식 할아버지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당하는 것 같다’며 또다시 힘들어하셨습니다. 이춘식 할아버지는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강제동원 피해자 4명 중 유일하게 살아계시는 원고예요. 한·일 양국이 지금까지 강제동원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피해자의 고통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유족이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에 제기한 소송 대리인인 김세은 변호사는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도쿄촛불행동’ 행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은 이제라도 일제 식민지배의 책임과 인권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며 양국의 노력을 촉구했다.

1965년 일본과의 국교 수립 때 한·일 양국이 식민지지배의 성격이 불법인지, 합법인지에 대해 합의하지 않아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등 수많은 쟁점을 둘러싼 두 나라의 갈등과 피해자 고통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현재로선 우경화 길을 걷고 있는 일본 정부와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한국 정부가 진지하게 머리를 맞댈 가능성은 낮은 상태다.

학계에선 유해 문제가 이렇게 꽉 막힌 과거사 문제를 풀어갈 단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모 유해를 돌려달라는 유족의 요구를 일본 정부가 거절할 명분이 약한 데다 유해 수습과 봉환 과정에서 진상규명과 전쟁범죄의 참상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군 성노예와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도 유해봉환에 대해선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유족 동의·추도 통해 유해 인도해야

한때나마 양국이 유해봉환을 통해 화해를 시도한 경험도 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이후에 유족이 직접 일본에서 부모 유해를 모셔오는 형태로 봉환이 이뤄졌다.

그전까지의 유해봉환 과정과는 달랐다. 해방 후 50여년 간 한국 정부는 유족의 동의 없이 유해를 들여온 뒤 부산 영락공원이나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치하곤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본 외무성 직원이 한국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과장에게 인도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책임 있는 당사자가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과를 표명하는 등 예우도 갖추지 않았다. 전범 국가의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식민지 피해자의 유해를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주먹구구식으로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2008∼2010년에는 일본 정부가 한국 유족에게 사망 경위와 유해 수습·보관 경위가 담긴 자료를 제공하고, 희망자를 일본으로 초청해 추도식을 거행한 뒤 유해를 전달했다. 일본의 고위급 인사도 참석해 사과를 표명했다. 그러나 양국의 이러한 시도는 2011년 중단됐고 현재까지 이렇다 할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유해봉환, 일제 전쟁범죄 입증 단초

유해봉환 문제는 “내가 살고 싶은 국가는 어떠한 곳인가”라는 문제의식과도 통한다. 피해 사망자를 존중하지 않는 곳에선 살아있는 사람의 인권도 가볍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망자에 대한 존중은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사회의식과 연결된다. 조선인 유해는 두 나라가 얽힌 문제인 만큼 동아시아의 미래와도 관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바야시 도모코(水林知子) 일본 유골봉환종교인시민연락회의 활동가는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유해를 추도하고 유족과 고국에 돌려보내는 것은 식민지주의의 벽을 하나씩 허물어가는 것과 연결된다”며 “이는 우리들이 어떠한 동아시아 사회를 지향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에 끊임없이 유해봉환은 요구하되 무작정 들여와서는 안 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양대륭 도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사무국장은 “조선인 유해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증거”라며 “진상규명과 책임을 묻지 않고 다 가져가겠다고 하면 일본 정부가 속으로 반길 것”이라고 말했다. 1945년 8월 수많은 조선인을 태우고 일본 아모모리현에서 부산항을 향하던 중 폭발한 ‘우키시마호’ 유족들이 일본의 폭침 사실 인정과 사죄를 요구하며 도쿄 사찰 유텐지에 안치된 유해 봉환을 거부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유족이 있는 유해와 달리 무연고 유해는 국가가 들여올 필요가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일본이 모든 기록을 공개한 뒤 유족을 최대한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사 규명 위해 국제사회와 연대해야

일제 피해국은 한국 외에도 중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대만, 미얀마, 말레이시아, 태국 등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다. 이들 나라와 일본 정부의 변화를 이끌어내긴 위한 연대의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역사왜곡을 일삼는 우익의 목소리가 큰 일본 사회를 흔들기 위해선 국제 여론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일제 과거사 규명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나라다. 정치·경제·사회 수준과 국민의 역사의식은 함께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사죄하면 일제 만행을 겪은 다른 나라에도 언젠가 도미노처럼 연쇄 사죄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아시아 다른 나라의 사죄 요구는 늘어날 수 있다. 실례로 샹그릴라 호텔 체인을 소유한 말레이시아 갑부 로버트 쿠옥(95)씨는 2017년 자서전을 내고 말레이시아의 한 마을을 학살한 일제의 전쟁범죄를 맹렬히 비판한 바 있다.

북한과의 협력도 필수다. 일본 정부는 유해봉환 등 과거사 문제를 회피할 때마다 남북 분단을 핑계 삼았다. 유족이 북한에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유해봉환을 거부하기도 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는 2018년 7월 북측 민화협과 협력해 남북이 함께 유해봉환에 나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전쟁터에 투입되기 전 일장기를 들고 찍은 사진. 행정안전부 제공

가해자가 침묵·은폐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일본 내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의 증언과 기록을 수집하고 자료를 모은 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일본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피해자 수백명의 증언을 수집하고 일본 도서관, 공공기관, 기업 등에 보관된 비공개 자료를 모았다. 창씨개명한 조선인이 포함된 명단에서 조선인을 선별하며 수많은 명부를 정리했다. 이러한 자료는 진상규명과 유족찾기 등 과거사 정리의 기초가 됐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 더 많다.

일본 진보사회학자 히구치 유이치 전 고려박물관장은 “한국에서는 해방 직후 일본 관료가 대부분의 문서를 소각했지만 북한은 바로 소련이 들어오면서 자료가 보존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남북 정부가 협력해 자료를 보완하고 연구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민화협(대표 상임의장 김홍걸)은 ‘조선의 혼, 아리랑의 귀향’ 1차 사업으로 지난 3월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서 모셔온 조선인 유골 74위 중 세 분의 유가족을 찾았다고 17일 밝혔다. 민화협 측은 “한 분의 유가족은 미국에, 두 분의 유가족은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유가족이 원하면 유해를 가족 품으로 보내드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현미·곽은산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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