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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끌려간 아버지들’ 흔적 방치… 국가가 나서 찾아야”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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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7 06:00:00 수정 : 2019-09-16 22: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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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디에도 국가는 없었다 / “日정부 기록 공개 안해 생사 몰라 / 시어머니 대신해 日 사과 받을 것” / 남편·시어머니 한 짊어진 신명옥씨 / 수많은 조선인 사망 기록 담긴 자료들 / 기록보존소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 日은 물론 손 놓은 한국 정부도 야속 / 시아버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 경악 / 세상 뜬 남편 대신 나선 정윤현씨 / 강제동원 됐지만 기록 없는 무자료 유족 / 백방으로 뛰어 흔적 찾았지만 성과 없어 / 日에 자료 요청해도 “없다” “기다리라” / 국가기록원서 이름 한 줄 찾은 게 다일뿐 / 강제동원 피해 유족 지원책 시급 / 日 군인·군속 자료 일부만 간간히 건네 / 전범기업 조선인 노무자 기록은 안 내놔 / 日, 조선인 유골 무연고로 처리 일괄안치 / 한국 정부 제대로 된 역할 최선 다해야
“평생을 보고 싶다는 말도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사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영감, 영감’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셨어요. ‘영감이 너무나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저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제는 제가 하겠다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아내겠다고 다짐했어요. 남편과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며느리인 제가 해야 합니다.”
신명옥(73)씨는 1944년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시아버지를 잃은 시가의 아픔을 전하며 눈물을 흘렸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인 신명옥씨(왼쪽)와 정윤현씨가 서울 용산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평생 시아버지를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난 남편과 시어머니의 사연을 이야기하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며느리가 지켜본 媤家의 고통

 

신씨 가족이 시아버지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건 사후 59년 만인 2003년이었다. 평생 아버지 소식을 찾아 헤맨 남편이 국가기록원에서 자료를 찾아내면서다. 신씨 가족을 원통하게 한 것은 시아버지의 유골이 1970년 일본에서 들어와 부산 영락공원에 안치된 사실이었다. 그렇게나 찾아 헤맸는데 가족들도 모르게 국내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마음대로 유골을 들여온 뒤 유족을 찾아주지 않아서 발생한 일이다.

 

그나마 신씨 가족은 운이 좋은 경우다. 일본 정부가 기록을 공개하지 않아 아무런 단서조차 찾지 못한 가족이 많다. 기록이 없어 그간 이뤄진 국가 보상에서도 배제됐다. 유족 중에는 아버지의 온전한 뼈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묻혔던 흙 한 줌이라도 얻어 제사 지내고 싶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있어 우리는 가해자인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고 국제사회에 더욱 당당하게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 생존자 대부분이 사망하고 자녀들마저 나이가 들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고통을 생생히 목격한 신씨마저 떠나면 우리 사회는 과거 일제의 만행을 고발할 증인을 또 한 명 잃게 된다. 그럼에도 역사의 증인인 이들을 대하는 국가의 노력은 턱없이 미흡했다.

1988년 민주화 이전까지 유족들은 국가에 그 어떤 요구도 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지냈다. 2004년 노무현정부 때 비로소 강제동원 관련 국가 조직이 생기고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박근혜정부 때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는 풀지 못한 과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채 문을 닫았다.

학계와 시민단체는 16일 강제동원피해자 유해봉환은 과거사 문제를 풀 중요한 열쇠라고 입을 모은다. 인도주의 문제인 만큼 일본이 거절할 명분이 부족하고 유해봉환 과정에서 진상규명과 피해자 명예회복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우리마저 다 죽고 나면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더 뻔뻔하게 주장할 것”이라며 “우리가 역사를 잊고 과거를 되풀이할 게 아니라면 국가가 진상규명과 유해봉환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신명옥씨의 시가는 2003년 당시 정부기록보존소(국가기록원)에서 시아버지의 사망기록을 확인하기 전까지 생사를 모른 채 지냈다. 1944년 일제에 의해 끌려간 뒤 반세기 넘게 감감무소식인 아버지가 설마 살아계실까 싶었지만 한 줄기 희망을 놓지 못했다.

신씨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아버지가 북한에 있을지도 모른다”며 이산가족 상봉신청도 했다. 이들의 오랜 기다림과 좌절은 일본 정부가 과거에 식민지 조선인을 자국 국민이라며 끌고가 놓고 패전 후에는 국적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한국 유족에게 생사 여부조차 알려주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정부 간 교섭을 통해 몇 차례 자료를 건네받은 한국 정부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조선인의 사망 기록이 담긴 자료는 기록보존소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유족이 백방으로 노력해 자료의 존재를 확인하고 꺼내보기 전까지는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유족 모르게 유골 들여온 한국 정부

신씨의 남편 박원배씨는 3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가 60대에 들어서야 가까스로 찾은 아버지의 기록들은 놀라운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 박헌태씨는 1944년 9월20일 일본 육군으로 끌려가 같은 해 12월19일 중국 안징성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 유골은 1970년대 부산 영락공원에 들어와 안치돼 있었다. 노무현정부 때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1970년대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유골 중에 신씨 시아버지 유골도 있었던 것이다.

“1970년이면 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예요. 그때 알았다면 시할머니가 아들의 유골을 품에 안아보기라도 했을 텐데…. 정부가 가족을 찾아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수많은 세월 시아버지를 찾아 헤맸어요.”

더욱 기막힌 건 시아버지의 징용 기록에 찍혀 있는 동그라미 표식이었다. 시아버지가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됐음을 의미했다. 가족들은 일제의 총에 맞아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일제의 침략전쟁에 공을 세운 ‘전쟁 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신씨 가족은 2007년 야스쿠니신사 무단합사 철폐 1차 소송에 참여했다. 남편은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세상을 떠났고, 2년 뒤에 시어머니도 눈을 감았다. 가족이 평생 싸워온 일의 책무는 오롯이 며느리인 신씨에게 남겨졌다.

“돌아가시기 전에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물으니까 시어머니가 ‘영감, 영감’ 하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야스쿠니에서 네 아버지 이름 석 자 빼라, 왜 거기 귀신이냐, 우리 집 귀신이지’라면서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꼭 빼낼 테니까 편히 가시라며 손잡고 울었어요.”

그나마 신씨 가족의 상황은 아버지가 끌려간 것만 알고 어디서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등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유족에 비해 나은 편이다. 그간 일본이 전달한 자료는 극히 일부에 불과해 피해자가 어디서 사망했는지, 유골이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생사조차 모르는 무자료 유족

정윤현(66)씨의 남편 박광식씨는 평생 아버지의 소식을 모른 채 1992년 세상을 떠났다. 신씨처럼 정씨도 남편의 한을 풀기 위해 짐을 떠맡았다. 남편은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가지만 꼭 찾아서 우리 아들에게 남겨달라”는 말을 남겼다.

정씨 가족은 ‘무자료 유족’이다. 남편 박씨는 1944년 7월 생후 3일 만에 아버지와 헤어졌다. 아버지가 동원됐다는 사실은 그의 부재와 주변에서 들려준 이야기로만 알고 있을 뿐 생전에 공식 기록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유골이 어느 땅에 묻혀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정씨는 시아버지의 기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옛 시댁이 있던 경기도 화성을 찾아 시아버지를 기억하는 노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한 분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일본 후쿠오카의 어느 탄광에서 함께 일했는데 귀국선이 너무 좁아 그분만 배를 탔다는 것이었다. 다음 배로 오겠다던 시아버지는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정씨가 찾아다닐 때는 그분이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미국에 있는 자녀를 어렵게 수소문해 만났지만 별달리 아는 바가 없었다. 면사무소, 법원 등에도 당시 기록은 없었다. 결국 일본 후생노동성과 우정성, 사회보험업무센터에 자료를 요청했지만 “자료가 없다”, “기다리라”는 답변만 왔다. 가해자인 일본에 자료가 있는 이상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일본은 해방 직후부터 노무현정부 때까지 군인·군속 자료 일부만 건건이 건넸을 뿐, 전범기업들이 갖고 있는 조선인 노무자들의 기록은 내준 적이 없다.

갖은 노력 끝에 유일하게 발견한 건 국가기록원에 있는 ‘왜정시피징용자명부(조선인 노무자명단)’에 적혀 있는 시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이승만정부 때 만들어진 징용 명부였다. 여기에도 후쿠오카의 어느 탄광에서 일을 했는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노무현정부 때 만들어진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는 11년간 활동하면서 정씨에게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임을 인정해준 결정통지서 한 장만을 발급했을 뿐,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외의 정보는 주지 못했다. 그리고 2015년 해산했다.

“시아버지와 같은 노동자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갖고 있는 모든 자료를 공개할 때 그 죽음의 진실을 알 수 있어요. 이러한 일은 피해자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데 피해자와 유족이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일본 정부는 자국에 산재한 조선인 유골을 무연고로 처리한 뒤 도쿄에 있는 지도리가후치전몰자묘원에 안치하고 있다. 애타게 찾고 있는 한국 유족을 외면한 채 찾아주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유족 중에는 합동 매장돼 온전한 개인으로 분리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아버지들’의 흔적을 찾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강제동원 피해자 자녀 세대마저 세상을 떠나면 무연고 처리된 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정씨는 이제라도 국가가 제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변에 생존자가 많았어요. 그때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했더라면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을 거예요. 더 늦어서는 안 됩니다. 후대로 넘겨서는 안 돼요. 국가가 나서야 합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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