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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서 온 유골마저 무연고처리… 희생자들 ‘귀향’ 외면한 조국 [잊힌 자들의 머나먼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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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17 06:00:00 수정 : 2019-09-16 22: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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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원 피해 눈 감았던 정부 / 피해자 기만한 韓·日청구권협정 / 日, 군인·군속 피해자만 보상대상 삼아 / 전범기업 노무자·위안부 등 배제시켜 / ‘완전하고 최종적 해결’ 명시 논란 불러 / 日협조 절실한 유해 송환 언급도 안해 / 1969년 유골 송환 합의했지만… / 日, 2년 뒤 2만여명 연명부·유골 전달 / 정부, 일부만 유족 찾아주고 책임 방기 / 고향 못 찾은 유골들 ‘망향의 동산’ 안치 / 韓 “일괄 송환” 요구 日 거부… 협상 답보 / 해방 60년 지나서야 실태 조사 / 유족들 군사정권 무서워 얘기 못 꺼내 / 1980년대 민주화 후 목소리 내기 시작 / 2004년 특별법 제정·진상규명위 출범 / 11년 존속 후 해산… 또다시 홀로 투쟁

한국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와 유골 문제를 일본 정부와 논의하기 시작한 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결 즈음부터였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모든 청구권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하면서 이 협정을 근거로 삼지만, 당시 논의과정을 보면 양국 정부가 매우 불완전한 형태로 협정을 맺은 걸 알 수 있다.

해방 후 전쟁을 겪은 가난한 한국과 과거사 문제를 빨리 털어버리고 싶어한 일본 정부는 일제강점의 성격조차 규정하지 않은 채 협정을 체결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차관을 받고, 현금이 아닌 ‘일본의 생산물과 노동력’을 들여왔다.

일본 정부는 1910년 한·일병합이 합법이었다고 주장하면서도 경제원조를 했고, 한국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자국민이 겪은 엄청난 피해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은 협상 당시 한반도 내 동원자를 제외하며 군인·군속의 피해 규모를 축소해 한국 측에 제시했다. 전범기업이 동원한 노무자는 전부 배제했다. 일제에 의해 ‘BC급 전범’이 된 조선인 문제도 일본 측이 거부해 교섭대상에서 제외됐고, 일본군 ‘위안부’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조선인 원폭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이 모든 문제를 뒤로한 채 미봉책으로 협정을 맺어 놓고 양국 정부는 한·일청구권 협정 제2조 1항에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시하며 피해자들을 기만했다. 한국 대법원이 2018년 10월 판결에서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해 배상을 청구한 협상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한 것”이라며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해 준 이유다.

1991년 8월27일 일본 외무성의 야나이 조약국장도 참의원 예산위원회 심의에서 “청구권협정으로 양국이 포기한 것은 국가의 외교보호권이며 개인청구권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여전히 수많은 기록이 일본에만 있고, 그 기록을 통해 찾아야 하는 유골 문제는 청구권협정 조항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한·일 양국으로부터 외면당해

이후 한·일청구권협정은 피해 생존자와 유족의 권리를 짓밟는 족쇄가 됐다. 이들은 협정을 맺은 박정희정권에 입도 벙끗하지 못했다. 이희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는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끌려가 고문당하던 시절에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정희정권은 1974년에서야 대일민간청구권 보상법을 제정해 피해자 1명당 30만원을 지급했다. 대상은 군인·군속 사망자로 제한했다. 가까스로 고국에 돌아온 생존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은 한 푼도 없었다. 이 돈을 받은 유족은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780여만명)의 0.1%(8552명)에 불과했다. 지급액 기준으로는 무상 3억달러의 1.48%(26억원)였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조선인 유골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1947년 연합국군총사령부에 의해서였다. 양국의 외교적 노력으로 송환된 건 1969년 제3차 한·일 정기각료회담에서 유족 및 연고자에게 유골을 전달하기로 합의하면서였다. 일본 정부는 유족을 찾아주라며 1971년 2만1692명이 등재된 ‘구 일본군 재적 조선 출신 사망자 연명부’와 일부 유골을 한국에 전달했다.

하지만 유골은 일부 유족에게만 돌아가고 나머지는 부산 영락공원에 무연고 처리돼 안치됐다. 한국 정부가 가족을 제대로 찾아주지 않아서다. 1977년 천안 망향의 동산을 만든 뒤에는 이곳에 안치했다.

1974년 한국 정부는 “유족이 확인된 유골을 들여오는 방식으로는 백년 후에도 모국에 봉환되지 못하는 유골이 있을 것”이라며 일괄 송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가 거절했다. 북한 측 유골이 한국에 전달돼 향후 북한과 갈등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였다. 1984년부터는 일본 정부도 일괄 송환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해방 60년 만에 정부조직 출범…2015년 해산

국가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에 강제동원 피해자 자녀들은 대체로 비슷한 양상의 고난을 겪었다. 근현대 시기의 한국에서 가장의 부재는 삶의 기반 붕괴를 의미했다. 피해자 자녀들은 외동이거나 형제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일제가 20대 초중반의 건장한 남성을 극악하게 끌고 가면서다. 남은 가족마저 사망하거나 어머니가 재가하는 등 많은 유족이 가족 해체를 경험했다.

이들의 고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권 상실과 피해자를 배제한 협정 체결 등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아 발생한 역사적 고통이었다. 유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건 1988년 이후였다. “내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밝힌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나온 것도 1991년이었다.

민주화가 이뤄졌어도 국가가 먼저 피해자의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준 적은 없었다. 유족들은 1991년부터 일본 사법부에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투쟁을 방관했다. 일본 사법부는 일본 행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해방 후 반세기 이상 지났지만 한국 정부는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자국민이 당한 피해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유족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피해 현황 파악과 진상조사, 대일외교를 담당할 행정조직과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다 끝난 일을 왜 또 문제 삼으려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갖은 노력 끝에 2004년 특별법(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과 함께 정부조직인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해방 60년 만이었다. 위원회는 국가가 처음으로 공식기관을 설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한·일 정상회담 이후 양국은 처음으로 군인·군속에서 나아가 노무자에 대한 유골봉환 논의를 시작했지만, 실제 송환은 군인·군속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위원회는 11년간 존속하면서 대대적으로 피해자 판정에 나서 일부 성과를 거뒀으나 보수정권으로 바뀐 뒤에는 6개월, 1년 단위로 조직이 기형적으로 연장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또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때 일본 정부가 한반도 내 강제동원 피해자를 제외한 것처럼 위원회도 지원대상에서 국내동원 피해자를 배제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위원회마저 2015년 문을 닫으며 피해자들은 또다시 홀로 일본 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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