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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민들의 비참한 삶 사실적 묘사 … 한국 리얼리즘의 시금석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08-06 07:00:00 수정 : 2019-08-05 20: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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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유현목의 ‘오발탄’ / 상이군인·양공주·참전용사… / 난민과 다를 바 없는 해방촌 / 절망을 이기려는 노력 눈물 나 / 국내선 빛 못보고 해외서 알아봐 / 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초청 / 5·16 군정 땐 3년간 상영금지 / 제작비 부족해 촬영만 13개월 / 김진규·최무룡 등 당대 스타 / 개런티도 미리 안 받고 열연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에서 유현목(1925∼2009) 감독의 ‘오발탄’(1961)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역사를 이룬다. 한국영화 최고작을 손꼽을 때 나운규의 ‘아리랑’(1926)과 더불어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작품이며, 전후 영화 비평사에서 ‘한국영화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기준이 돼 왔다. 전후 해방촌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소외된 하층계급의 삶을 다룬 이 영화가 보편적 역사성을 띨 수 있었던 것은 ‘오발탄’이 가진 두 가지 힘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배제된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언제나 새로운 각도에서 읽힐 수 있는 잠재적 다층성이다.

배우 김진규와 문정숙은 영화 ‘오발탄’에서 빈곤과 고통을 감내하는 실향민 부부 연기로 극찬을 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오발탄’이라는 문제작의 탄생

‘오발탄’은 정치적 격동 속에서 등장했다. 1950년대 말 자유당 시절 기획돼 1960년 4·19혁명 직후 개봉됐다가 5·16 군사정권 하에서 3년간 상영 금지된 바 있다. 그만큼 ‘오발탄’은 제작 과정, 작품의 주제적 측면, 또한 이후의 수용 과정에서 모두 독특한 역사성을 획득한 작품이다.

영화는 여러모로 기존의 영화 제작과는 달리 출발했다. 공보부의 영화 담당이 가위를 들고 “빈민촌의 초라한 판잣집이 나오면 나라 망신이라고 삭제”하던 자유당 시절, 유현목 감독은 해방촌 판잣집에 사는 월남민 일가족의 남루한 삶을 그린 이범선의 동명 소설을 선택했다. 당시 기술자협회장이었던 영화 조명계의 거장 김성춘, 카메라맨 김학성과 의기투합해 기존의 제작 관행을 벗어나 감독과 배우, 기술자들이 서로 제휴하는 동인제 형식으로 제작에 착수했다.

김진규와 최무룡, 윤일봉, 문정숙, 김혜정, 문혜란 등 당대의 스타 배우들 역시 보수를 미리 받지 않고 출연해 새로운 동인제 제작 방식에 기꺼이 힘을 실어주었다. 다른 일로 얻은 수익으로 그때그때 작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촬영에만 1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는 제작자의 간섭과 제약 속에서 한 감독이 1년에 3∼4편 이상 영화를 찍어내고 신파 멜로드라마나 B급 상업영화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오발탄’은 이야기와 제작 방식에서의 급진성을 품에 안고 태어난 문제작이었다.

영화 ‘오발탄’에서 전후 한국 사회의 도시 근대화가 비껴 나간 해방촌 빈민가는 등장인물들의 실존적 세계를 구성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 리얼리즘의 시금석, 그러나 모더니즘으로도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양가성

당시 4·19혁명을 체험했던 한국의 비판적 문화예술인들은 프랑스 예술인들의 레지스탕스 운동과 앙가주망 운동을 높게 평가하고 예술인의 사회참여를 스스로의 책무로 받아들였다. 전후 한국 영화사와 비평 담론의 장에서 ‘오발탄’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금석으로 평가돼 왔다. 당연히 형식적인 스타일에서도 ‘오발탄’은 오랫동안 리얼리즘적 특성들-예를 들어, 롱 테이크 기법과 사회 반영으로서의 인간 군상-이 주목받아왔다. 그런데 위의 맥락들을 따져 보면, ‘오발탄’의 리얼리즘은 현실을 반영하는 수동적 테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 참여이자 영화 운동의 맥락 속에서 발현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최근 새로운 관점에서 ‘오발탄’이 보여 주는 영화적 실험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든 월남민의 실성한 듯한 외침이 날카로운 제트기의 엔진 소리와 중첩되듯이, 유현목 감독은 사운드와 이미지가 충돌하는 실험이라든지 과감한 몽타주 편집을 서슴지 않았다. 리얼리즘 미학에 상반된다고 믿어 온 모더니즘 스타일을 유 감독은 자신만의 변증법적 방식으로 소화한 것이다. 이렇게 묘사된 해방촌 공간은 전후 월남민들이 겪는 상실의 경험을 심리적일 뿐 아니라 감각적으로 전경화함으로써 주류 현실에서 소외된 자들을 위한 영화 이미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영화 ‘오발탄’에서 한때 연인이었던 상이군인 경식(윤일봉)과 명숙(서애자)이 길거리에서 우연히 부딪쳐 마주치는 장면. 경식은 6·25전쟁으로 다리를 잃고 명숙은 주한미군 위안부가 된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계 상황에 놓인 인물들

‘오발탄’의 세계는 한계 상황에 놓인 주인공들로 가득하다. 회계사로 일하지만 한 가정을 지탱하기엔 역부족인 회계사 철호(김진규), 6·25전쟁에 참전했으나 실직 상태에 있는 동생 영호(최무룡), 같은 전우이자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경식(윤일봉) 등이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이 당면한 빈곤과 폭력, 부조리의 감각들은 영화 속에서 즉자적으로 전달된다. ‘오발탄’은 전후 한국의 사회 정치적 좌표에서 월남 이산자 집단이 차지하는 이상한 공간성을 허기와 고통, 상실, 질병, 장애, 수치의 감정 등과 같은 매우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요소들과 병치하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발탄’의 주인공들은 막다른 한계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오르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분단의 비애와 실향민의 좌절감, 우울한 부조리의 감각들 속에서 ‘오발탄’은 상승이란 역설적인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 준다. 대표적인 장면은 계리사 사무소와 시장 골목, 현대식 건물들을 지나쳐 주인공 철호가 힘없이 한 발 한 발 오르막길과 계단을 지나 남산 자락에 있는 해방촌 빈민가로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난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사회의 주변부로 계속 밀려나고 ‘시각적으로’ 문제시되는 약한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음을 멈추지 않는 실존자들로서 가파른 땅을 올라간다.

◆‘오발탄’을 본 외부의 시선들

잘 알려진 대로, ‘오발탄’은 해방촌의 한 가정이 겪는 빈곤과 죽음, 범죄 등을 담고 있는 문제적 텍스트로 검열 당국의 눈 밖에 나고, 북에서 온 노모가 외치는 ‘가자! 가자!’란 대사라든가 빈곤한 사회를 너무 어둡게 그렸다는 이유로 바로 상영 금지됐다. ‘오발탄’을 금지되고 잊힌 작품의 운명에서 건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해외 영화계에서의 주목이다. 1963년 제7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 초대되는 과정에서 ‘오발탄’의 국내 상영 금지가 해제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오발탄’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제에 출품된 한 벌의 프린트(극장 상영용 필름)가 살아남은 덕분이다.

이미 1960년대 당시에, 세계적 수준의 작품으로 ‘오발탄’을 인정한 두 명의 외국인이 있었다. 1960년대 초 일본 요미우리신문 특파원으로 한국에 머물렀던 히노 게이조 작가와 미국 국무성 영화제작소 고문으로 체류했던 리처드 맥캔 남가주대 영화과 교수가 그들이다. 히노 게이조는 ‘오발탄’이 보여 주는 “주체적으로 절망적인 성실성”이야말로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피력했다. “일체의 거짓 희망을 거부하고 어둠의 극한에서 예감되는 밝음만을 믿으려 하는” 유현목 감독의 의지 속에서 그는 “1945년에 외부로부터 부여된 자유를 정말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또 ‘오발탄’의 유동감 있는 연출력과 철학적 깊이에 매료된 리처드 맥캔 교수는 이 영화를 19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할 수 있게 주선한 인물이다. 그는 직접 한국의 공보부를 설득하기도 했는데, 그해 8월 공보부는 “‘오발탄’이 국내외 저널리즘에 의해 그동안 줄곧 예술 작품으로써 높이 평가돼 온 반면 미국으로부터의 수입 희망도 있고 해서”라며 상영 보류 조치를 해제했다.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올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이에 대해 1960년대 대표적인 영화인인 정진우 감독은 제24회 춘사영화제 공로상을 받으며 이런 소감을 밝혔다. “한국 영화감독 모두의 꿈을 봉 감독이 이루어 주어 고맙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 정치적으로 피폐하고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환경 속에서 꾸준히 새 길을 개척하고 지금의 한국영화를 이룰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한 영화인들 앞에 유현목 감독과 ‘오발탄’이 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현선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CGSI)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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