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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현대사 온몸으로 이겨낸 이희호 여사의 97년 생애

입력 : 2019-06-12 06:00:00 수정 : 2019-06-12 07: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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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조언자이자 정치적 ‘동역자’/ 美 유학한 1세대 여성운동가 / 만40세 DJ 만나 운명적 결혼 / 군사정권 내내 감시·탄압 겪어 / 영부인 시절 여성부 신설 주도 / 靑 나온 뒤 재야 ‘정신적 지주’로
2018년 1월 1일 이희호 여사가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10일 밤 소천한 이희호 여사는 남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격변의 현대사를 가냘픈 몸으로 부딪히며 이겨낸 인물이다.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정치인 아내가 된 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남편과 함께 험로를 걸었지만 대통령 영부인의 자리에도 올랐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역자(同役者)’라는 평을 받았다. 자택에 걸려 있던 ‘김대중 이희호’ 문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만 이 여사는 ‘인동초’ 김 전 대통령과의 동행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여성운동가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이희호 여사(오른쪽)가 이화여고 재학시절 시절의 모습. 연합뉴스

이 여사는 1922년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 사이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다니고 1950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 램버스대와 스카렛대에서 유학했다.

 

1958년 귀국한 그는 대한YWCA 총무를 맡아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아 남녀차별적 법 조항을 고치기 위한 활동에 힘썼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출범한 ‘여성단체협의회’ 조직화에도 앞장섰다.

1962년 5월 10일 이희호 여사의 외삼촌 이원순씨 댁에서 치뤄진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결혼식. 뉴시스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차씨는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정치 낭인’에 불과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 여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여사는 후일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고 밝혔다. 1963년 3남 홍걸씨를 낳았다.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버팀목으로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해제에 따른 구속자석방과 아울러 당국의 '보호'에서 풀려난 김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1962년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는 등 ‘민주화 운동가의 아내’ 이 여사의 시련은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1972년), 납치사건(1973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군사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옥중의 김 전 대통령에게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청와대 안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독대해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시간이 한 달에 20분밖에 되지 않자 이 여사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각각 출판됐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 19일 일산자택을 나서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집밖에서 기다리던 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 당선의 꿈을 이뤘다.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이 여사도 2000년 펄 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했다.

2018년 8월 18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9주기 추도식에서 이희호 여사가 문희상 국회의장의 추도사를 듣는 모습. 연합뉴스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47년 동안 함께했던 ‘동지’와 작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동교동계의 구심점이자 재야인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2011년 말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 조문단 자격으로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동행’에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회고했다.

 

◆이희호 여사 주요 어록

 

△“만약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 첫 대선 출마 찬조 연설에서)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부에서는 당신이 외국에서 성명 내는 것과 국제적 여론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특히 미워하는 대상이 당신이므로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1972년 해외에서 유신반대 투쟁하던 김 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당히 일하다가 고난을 받고 있는 우리의 남편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1976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외국 언론에)

 

 

 

△“하루를 살더라도 바르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이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들은 당신의 고통스러운 생활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떳떳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77년 김 전 대통령 징역 5년 확정 이후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 사형 선고되자 편지를 통해)

 

△“청년 김대중에게 정치가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2008년 출간 자서전 ‘동행’에서)

 

△“우리는 정말 서로 인격을 존중했어요. 늦게 결혼했고 결혼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참 좋은 분을 만나서 내 일생을 값있고 뜻있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2016년 출간 ‘이희호 평전’에서)

 

◆北, 조문단 파견할까… 온다면 누가?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다. 이제원 기자

북한과 인연이 깊은 이희호 여사 별세로 북한에서 누가 조문을 올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문단 위상에 따라 남북관계나 북·미대화에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통일부는 11일 오후 9시 현재까지 북한이 조문단 파견 등의 의사를 공식적으로 전해온 것은 없다고 밝혔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이 여사의 빈소에서 북한의 조문단 파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부고를 (북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통일부는 “이 여사 장례위원회의 요청으로 부음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과거 사례를 살펴보면 2009년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바로 북한은 다음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 명의의 조전을 보내고, 김대중평화센터 앞으로 팩스를 보내 특사 조의방문단 파견의사를 밝혔다. 사흘 뒤인 8월21일 김기남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와 김양건 당시 통일전선부장 등 6명으로 구성된 특사 조의방문단을 고려항공 특별기편으로 서울로 파견했다.

 

김기남 노동당 비서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조문단이 지난 2009년 8월21일 오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식 빈소가 마련된 국회분향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뉴시스

북측 조문단은 첫날 조의를 표하고, 이틀째인 22일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만나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사실상 첫 남북고위급 회담을 열었다. 당시 김양건 부장은 현 통일장관과 만나 “북남관계가 시급하게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문단은 당초 예정된 22일 북측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남 일정을 하루 연장해 23일에는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을 예방하고 김 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이번에도 북한이 고위급 인사를 보내 조문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북한은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김 위원장 명의의 조전만 보냈다. 조전을 보낸 뒤 4시간 만에 제2차 핵실험을 했는데, 미리 준비한 핵실험으로 인해 조문단을 보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01년 3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별세했을 때는 북측이 송호경 당시 아태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문단을 파견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가 2011년 서거했을 때 이희호 여사가 직접 평양을 방문해 조문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났기 때문에 2009년 파견한 것과 동급의 고위급 조문단을 보낼 수도 있다”며 “이 경우 박광호 당 중앙위원회 선전담당 부위원장과 장금철 통전부장이 방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박 부위원장 대신 김기남 전 부위원장과 김여정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방문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정 본부장은 이어 “북한이 최룡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조문단 대표로 파견한다면 김 위원장의 적극적인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확인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귀전·조병욱·박현준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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