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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 정치적 무기로 악용… 훼손·파기 감시기구 설치해야”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입력 : 2019-06-04 06:00:00 수정 : 2019-06-03 19: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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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기록의 날… 전문가 좌담 / 곽건홍 국가기록관리위원장 / 감사원 같은 국가기록원 견제 기구 필요 / 기록관리 방법론 정립 연구기관도 절실 / 17개 광역지자체 중 2곳만 기록원 갖춰 / 지역별 설치… 지방자치 투명성 높여야 / 이소연 국가기록원장 / 정계, 부당한 통로로 기밀 자꾸 들추니 / 공무원들 민감한 기록은 안 남기려 해 / 최근에야 ‘책임소재 규명에 필요’ 인식 / 기록, 정치로부터 보호할 법제 수립돼야 / 김익한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 / 정보기관 ‘비밀’ 민주적 통제수단 필요 / 공공기록물법 제정 20년… 투자 미미 / 표준시스템 구축 후 정비작업은 손 놔 / ‘기록체계 구축’ 정치권서 입법 나서야

국가의 기록은 왜 중요할까. 1999년 김대중정부가 ‘공공기록물법’을 만들며 든 이유는 크게 3가지다. 국회·정부·법원 등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마음대로 자신의 기록을 훼손하거나 없애지 못하게 함으로써 투명성을 확보하고 책임행정을 구현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국가의 기록이 권력자들에 의해 쉽게 휘둘렸고 종종 사유화됐다. 공공기록물법 제정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가 이만큼 뿌리 내렸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올해는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이자 국가기록원의 전신인 정부기록보존소 출범 50주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기록문화는 어디쯤 왔을까. 세계일보는 ‘기록의 날’(6월9일)을 앞두고 학계와 현장을 넘나들며 오랫동안 기록관리를 연구해 온 이소연 국가기록원장(덕성여대 교수), 김익한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명지대 교수), 곽건홍 국가기록관리위원장(한남대 교수)을 지난달 23일 만나 우리나라 국가기록 체계의 변화를 짚어봤다.

#공공기록물법의 공과는.

이소연 원장 : 우선 시민들이 기록의 중요성에 눈을 뜬 점을 들 수 있다. 자기 일상과 생활권 안에서 자신의 관심사들을 기록하는 부분에선 깜짝 놀랄 정도로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공공기록물법 제정 등 사회적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모든 공공기관에 기록관리를 전담할 수 있는 인력이 적어도 한 명 이상 배치됐다는 점도 성과로 꼽을 수 있다.

김익한 원장 :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만드는 ‘4.16 기억저장소’에서 보듯 민간 영역의 기록문화가 대단히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예술계에선 이제 아카이브(기록관)를 활용하지 않으면 ‘트렌디하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다. 서울시에서 장년층의 노후 활동을 지원하는 이른바 ‘50+(플러스)사업’도 지역을 아카이빙하는 사업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가장 높다고 한다.

곽건홍 위원장 : 큰 성과 중 하나는 우리 사회가 ‘대통령의 기록도 공적자산’이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국가의 최고 정책결정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얼마 전 공개된 노무현 전 대통령 업무 기록에는 보완 지시와 함께 말미에 ‘미안합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후대 사람들이 이 기록을 통해 대통령의 정책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당시의 심정까지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종로구 국가기록원 서울기록센터에서 곽건홍 국가기록관리위원장, 이소연 국가기록원장, 김익한 한국국가기록연구원장(왼쪽부터)이 국민 알권리 실현의 기본 전제로서 공공기록물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재문 기자

김 원장 :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적어도 기록 분야에서는 시민사회 성장을 정치권과 공공영역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법이 제정된 1999년 시점에서 보면 군사정권의 ‘폭압’이란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민주주의 안정화가 가져다준 제도인 셈이다. 하지만 이명박정부 이후의 양상을 보면 기록은 종종 정치적 무기로 변질됐고, 공공기록의 혁신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기록이 없으면 반성도 없다’는 점에서 퇴보를 거듭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곽 위원장 : (공공기관들이) 기록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고, 공개하지 않던 문제들을 모두 극복했다고 보긴 어렵다. ‘기록관리 방법론을 전문화했는가’, ‘한국적 기록관리 이론이 있는가’ 등 물음에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아카이브에 관한 철학이 우리 사회에 없다는 점도 뼈아픈 지점이다. ‘아카이브가 도대체 뭐하는 기관인지 시민들이 모른다’는 얘기다. ‘망각의 반대말은 기억이 아니라 정의’란 말이 있다. 아카이브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기관이란 인식이 절실하다.

이 원장 : 공직사회는 기본적으로 기록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일단 한 번 기록이 생산되거나 공개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기록이 있어야 책임 소재가 밝혀지는 것도 사실이다. 공무원 입장에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부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한 일들을 증명하는 수단은 기록밖에 없다. 기록은 분명 공공기관을 투명하게 만들며 책임있는 사회를 만든다. 이런 인식이 여러 공공기관에 확산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정치권에서 자꾸 옛 기록을 들추는데.

김 원장 : 정치인들이 보호해야 하는 비밀은 공개하고 정작 국민과 공유해야 하는 것은 감춘다. 국가정보원 등의 ‘비밀’은 여전히 철옹성이다. 국정원이 다루는 문건들은 일정한 때만 되면 정치권을 통해 공개되곤 했다. 기록을 마음대로 없애거나 들추지 못하게 한 기록법은 우리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자꾸 기록이 무기로 악용되는 것은 정치인들이 절차적 민주주의 위반에 대한 죄의식이 없다는 얘기다.

이 원장 : 이처럼 국가기록이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공개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공무원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기록은 공개가 원칙이다. 하지만 보호해야 하는 기간에는 철저히 보호해야 한다. 마구 공개될 것이 뻔한데 어느 누가 민감한 기록을 남기겠느냐는 것이다. 기록관리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이슈다. 기록을 정치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권한이나 법제가 아직은 부족한 실정이다.

김 원장 :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기관들의 비밀기록들에 관한 민주적 통제도 필요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첩보 활동을 벌이는 미국의 경우 중앙정보국(CIA) 등의 비밀기록도 우리의 국가기록원에 해당하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이관받아 관리한다. ‘현재 사용 정보’로 이관되지 않는 경우도 생산 현황 등을 담은 연차보고서를 발간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곽 위원장 : 지난날의 국가기록원이 가장 반성해야 하는 지점은 기록을 정치적으로 사용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2008년 청와대 기록 유출 논란 당시 국가기록원장이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실의 고발장 초안과 관련 증거물을 받아 노무현정부 인사 10명을 검찰에 고발했다. 한국에서 기록의 정치성이 최초로 불거진 사건이 아닐까 싶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철저히 분석하지 않으면 재발 방지를 담보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하나.

이 원장 : 산재해 있는 국가기록 시스템의 통합 및 관리가 필요하다. 예컨대 국가의 ‘본질적 기록’인 공무원 인사기록은 현재 기록관리 체계에 편입돼 있지 않다. 전자인사관리시스템에서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갈무리해서 어떻게 보존하며 어떻게 서비스할 것인가에 대한 (종이기록과는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 굉장한 연구와 실험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예산이 충분하지 않아 현재로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김 원장 : 현재 국가기록의 기반이 되는 ‘표준기록관리시스템’은 2007년 도입 후 현재까지 한 번도 대규모 예산을 투여해 업그레이드 작업을 한 적이 없다. 요즘 시대에 보통 5년만 지나도 ‘구닥다리’라고 하는데 관리 시스템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형편이다. 예산 문제를 20년 넘게 지적해왔으나 변한 것이 없다. 전체 예산에서의 비율은 노무현정부와 비교해 오히려 줄었다. 문재인정부가 ‘기록의 정부’라는 노무현정부 계승을 표방하고 있지만 현장에선 ‘무관심하다’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곽 위원장 : 국가기록관리와 관련한 조사와 연구를 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지금까지 정부는 학계의 아이디어에 전적으로 의존해왔다. 심층적이며 장기·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관이 가장 시급하다. 이런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올바른 정책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 원장 : 기록관리 현장에서는 기록관리 요원들이 업무를 전담하지 못하는 점이 문제다. 기록관리를 공부하고 갔는데 막상 가보면 다른 일을 시킨다. 지금도 ‘제발 기록관리 업무만 하게 해달라’는 게 이들의 호소다.

김 원장 : 기록은 곧 ‘정체성’이므로 기록관리 요원들은 기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람들이다. 대단히 중요한 업무이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현장에서 기록관리 요원은 ‘고립’돼 있다. 심지어 기록관리 요원을 시간제 계약직으로 채용해 예비군 훈련 버스 운전을 겸임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곽 위원장 : 지역별 아카이브 구축도 시급한 문제다. 지역에서 생산된 기록은 지역에 보존돼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활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17개 광역지자체 중 서울과 경남만 기록원이 있다. 자치분권시대의 지역별 기록원은 지방자치의 투명성과 설명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김 원장 : 지난 20년간의 기록법 체계 반성의 핵심은 국회가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직도 학계 전문가들과 공무원들만 ‘줄다리기’를 하며 ‘잘하니 마니’ 하는 실정이다. 제대로 된 문제의식과 전문성이 있는 국회의원들이 모여 정부입법으로 탄생한 현행 공공기록물법을 의원입법 체계로 전환하면서 정부에 대한 의회의 민주적 통제를 수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록의 날’의 의미는 기록문화를 일상에 정착시킨 시민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에 방점이 있다. 시민사회 성장을 공공영역에서도 서둘러 따라가야 한다.

곽 위원장 : 우리 사회가 과연 ‘기록이 없는 나라’란 명제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지금도 국가기록들은 훼손되고 사라지고 있다. 공공기록의 생산과 관리 및 폐기를 철저하게 감시할 기구가 시급하다. 이런 기구가 있어야만 현장에서 기록관리가 된다. 미국 등 선진국의 국가 아카이브는 수평적 설명 책임성을 구현하는 기구다. 감사원이나 방송통신위원회처럼 정부 안에서 서로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기록원에 그런 기능이 부여돼야 국가기록 체계가 제도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

이 원장 : 공공기관의 기록요원들이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국가기록원도 이를 위해 모든 구성원이 전력을 다하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우리나라의 찬란한 기록관리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시대적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윤리강령을 기록의 날에 맞춰 시행하는 것도 이런 의지의 표현이다. 국가와 민간의 소중한 기록유산들이 정말 제대로 남겨지고 보관돼 국민의 삶에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노력하겠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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