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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기독교 묘지 매장”… 발굴 작업 속도 낼까?

입력 : 2019-05-29 07:00:00 수정 : 2019-05-28 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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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다룬 러 신문기사 24건 분석 / 그간 뤼순감옥 수인 묘지로 추정 / 日외무성 기록 등과 달라 확인 필요 / ‘제국주의에 맞선 영웅’으로 표현 / 安의사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8일 공개한 1909년 10월27일~1910년 4월21일 러시아 극동 지역신문들의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들. 성남=연합뉴스

안중근(1879.9.2∼1910.3.26) 의사의 유해가 묻힌 곳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기독교 묘지라고 보도한 러시아 언론 기록이 발견됐다. 그간 안 의사 유해 매장지는 다롄 시내 뤼순(旅順) 감옥 내 수인(죄수) 묘지로 추정돼 왔다. 답보 상태에 빠져 있는 안 의사 유해 발굴 작업이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러시아 지역신문 ‘우수리스카야 아크라이나’의 1910년 4월21일자 안 의사 관련 보도를 분석한 결과 안 의사 유해가 묻힌 곳이 뤼순 감옥이 아닌 ‘지역 기독교 묘지’라는 표현을 발견했다고 28일 밝혔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던 1910년 3월(9일 또는 10일로 추정) 면회 온 빌렘 신부(가운데 등 보이는 인물), 동생 정근, 공근을 만나고 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신문은 안 의사에 대한 사형이 집행(1910년 3월26일)된 지 26일이 지난 1910년 4월21일자 해외소식란에서 일본 아사히신문 특파원을 인용해 안 의사에 대한 사형 집행 과정 등을 전했다. 기사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15분 후 그의 몸은 의사에 의해 검시되었고, 관에 넣어져 튜렘(교도소)의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중략) 그 후 관은 지역 기독교 묘지로 옮겨졌다”고 적었다.

국가기록원은 기사 표현만 보자면 안 의사 매장지가 다롄 시내 민간 공동묘지일 가능성이 있지만 일본 외무성이나 일본·중국 매체 보도와 달라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국가기록원 관계자는 “같은 시기 아사히신문 보도는 안 의사 매장장소를 ‘감옥묘지’라고 보도했는데 러시아 신문과의 차이가 단순 오류인지 아니면 실제로 다른 묘지에 안 의사가 묻힌 것인지 추가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뤼순(旅順)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수감생활을 한 방 내부.

국가기록원은 1909년 10월27일부터 1910년 4월21일까지 안 의사 관련 러시아 신문 기사 24건을 분석한 결과 안 의사가 일제의 신문과 사형집행에 이르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신문 ‘쁘리아무리예’의 1909년 11월2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 의사는 하얼빈 일본 영사관에서 진행된 첫 신문에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그들에 의해 병을 얻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신문인 ‘보스토치나야 자랴’의 1909년 11월4일자 기사에도 안 의사가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쁘다.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말한 신문 진술이 그대로 실렸다.

김형국 국가기록원 연구협력과장은 “당시 러시아 지역사회에서 안 의사를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싸운 영웅’으로 표현하며 하얼빈 의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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