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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로 임명권자 정성 담아… 공직자 사기 진작”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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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5-20 07:00:00 수정 : 2019-05-19 21: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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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임명장 쓰는 인사혁신처 김이중 사무관 / 2003년 9대1 경쟁률 뚫고서 뽑혀 / 2명이서 1년에 7000~8000장 작성 / 대통령 친필·국새 찍힌 일종의 상 / 출력물보다 반영구적 보관 배려 / “순직 공무원 추서 때 가장 공들여 / 임명장 보며 초심 다잡는 계기 되길”
인사혁신처 김이중 사무관이 최근 정부서울청사 15층에 있는 사무실에서 자신이 작성한 국무위원 임명장 견본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뒤쪽 ‘공무원 헌장’도 김 사무관이 쓴 것이다. 이제원 기자

“제 전임자는 실·국장을 제외한 부처 직원들 가운데 유일하게 삐삐를 갖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분 아니면 갑자기 떨어진 업무를 처리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인사혁신처 김이중(44) 사무관은 ‘대체불가’ 공무원이다. 우리나라 공무원은 100만명이 넘는다. 하지만 그의 업무를 대신할 수 있는 공무원은 같은 심사임용과의 김동훈(41) 주무관뿐이다.

이들 업무는 사무관부터 국무총리까지 대통령 명의의 5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들 임명장을 붓글씨로 작성하는 것이다. ‘임명장’과 ‘대통령 문재인’이 적힌 가로 26㎝, 세로 38㎝의 종이에 이름과 소속 부처, 직위(보직)명, 임명 날짜 등 20∼30자를 반흘림 궁체로 쓴다. 임명장 중앙의 국새와 친필 서명 맨 뒷글자 위에 대통령 직인을 직접 찍기도 한다.

거의 모든 문서를 컴퓨터로 작성해 출력하는 요즘 대통령 명의 임명장을 손글씨로 작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정부서울청사 내 사무실에서 만난 김 사무관은 관리자의 길에 들어선 공무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앞으로도 국민과 국가를 위해 더 힘써달라는 격려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저도 2015년 4월 1일 사무관 임명장을 받았어요. 대통령 친필과 국새가 찍힌, 일종의 상을 받는 거잖아요. 개인적으로 뿌듯하고 가문의 영광인 까닭에 제가 직접 썼습니다. 특히 사무관 자리는 본격적으로 관리자의 길에 들어선다는 의미잖아요? 집행 권한도 늘겠지만 책임져야 할 일도 많아지겠죠? 저부터가 벽에 걸어놓은 임명장을 볼 때마다 다시 한 번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임명장을 붓글씨로 쓰는 것은 공무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한 임명권자의 정성을 나타낸다는 의미 이외에 ‘가보’를 더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한 현실적 배려도 담겨 있다. 김 사무관은 “컴퓨터로 출력한 글씨는 어찌 보면 종이 위에 토너 가루를 뿌려 얹힌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 종이에서 떨어진다”고 귀띔했다. 반면 붓으로 쓴 글씨는 천연한지에 스며든 까닭에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

김이중 전문경력관./2019.04.22 /이제원기자

김 사무관이 붓을 잡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기말고사를 마친 뒤 서예동아리에 들어가면서부터다. 휘호 대회 등 각종 붓글씨 대회에서 수십 차례 입선하고 대학에서도 서예를 전공했다. 공직도 붓글씨로 입문했다. 2003년 당시 행정자치부에서 훈장증과 표창장을 쓰는 전문경력자를 공모했는데 서예협회와 대학 추천을 받아 지원, 9대 1 경쟁을 뚫고 6급 주무관으로 뽑혔다.

임명장 작성 업무는 전임자가 퇴직한 2008년 5월부터 맡게 됐다. 2009년 대통령 명의 임명장 수여 대상자가 고위공무원에서 5급 이상으로 확대되면서 김 주무관도 들어왔다. 김 사무관은 “둘이서 1년에 쓰는 임명장은 7000∼8000장”이라며 “각자 하루 평균 15장을 쓰는 셈인데, 각 부처 인사시즌이 연말에 몰리는 데다 미리 써둘 수도 없어서 밤새 쓰거나 주말에 근무해야 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임명장 한장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5분 정도다. 서체는 궁체 정자와 흘림 중간 수준으로 쓴다. 궁체 정자는 보기에 유려하고 아름답지만 가로쓰기에는 다소 적당하지 않아서다. 국무총리나 인사처장 등 임명장을 받는 사람이 의식돼 잘 써지지 않는 경우도 있느냐고 묻자 김 사무관은 “그렇지는 않다”고 웃는다. 대신 네댓장의 파지를 낼 때가 있는데 바로 몸 상태나 기분이 안 좋을 때라고 한다. 이런 경우 아예 붓을 잡지 않고 푹 쉬면서 마음을 정돈한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작성한 약 4만장의 임명장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처음 쓴 한승수 전 국무총리나 유난히 보직 문구가 길었던 박영수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장도 떠오르지만 가장 잊지 못하고 공들여 쓰는 임명장은 순직 공무원들을 추서할 때다.

김 사무관은 “나도 공직에 있지만 그분들의 희생과 느닷없는 죽음,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심경이 복잡해진다”고 말했다. 그가 서예인 입장에서 보면 ‘기능’에 불과할 수 있는 임명장 작성 업무를 계속하는 힘도 이러한 보람과 각성에서 비롯한다.

“대통령이 손으로 쓰고 국새를 찍은 임명장을 주는 것은 ‘당신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람이니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철밥통’과 ‘복지부동’ 등 공무원에 대한 안 좋은 시각도 많은데 제가 쓴 임명장이 공직자로서 사명감을 새기고 공직에 입문할 때의 초심을 다잡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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