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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 권을 전해 받았다. 지난해, 소설 작법의 왕도를 캐묻는 경제전문가와 자리한 적이 있는데 그간 작업을 마치고 자비로 출판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목표를 달성한 모양이었다. 문학을 심중에 품고도 현실의 삶을 경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의 때늦은 도전이라면 응원이 마땅하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창작 욕구가 발동했다는데, 오랫동안 한 분야에 몰두해 일정 이상의 성과를 거둔 사람 특유의 뚝심과 두뇌회전력으로 소설쓰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눈치였다.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을 회의하고 경제적 무능력을 통감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초심자의 패기가 당혹스럽기도 하고, 그 호사 취미를 든든히 받쳐주는 여유가 배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결과물을 보내준 성의마저 무시할 수 없어 몇 장 들쳐보다가 그만 책을 덮고 말았다. 온갖 용렬한 생각이 다 밀려들었다.

예전에 소설가 Y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단편소설 하나를 쓰려면 적어도 한 달은 매달려야 하는데, 정작 그 원고료로는 한 달 생활도 못 하잖아요. 보다 못한 부모님이 시골집을 팔아 목돈을 떼 주시더라고요. 과연 글 쓰는 일을 생업이라고 할 수 있나, 스스로 작가라고 말할 자격이 되나 싶데요.” 예술계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Y의 고백은 좀 뜻밖이었다. 그는 꽤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나름 인지도가 있는 작가가 아닌가. 베스트셀러가 된 책 몇 권이 있어 어찌어찌 버텨왔지만 출간 때마다 매번 기대치에 미칠 순 없으니 그로서도 어지간히 버거웠던 듯싶었다. Y는 머잖아 직장을 얻어 더 이상 생활비로 고통받진 않는 삶을 택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 발표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Y야 그나마 번듯한 ‘갈아타기’를 했다. 며칠 전에는 어느 인터넷신문에서 미화원 취업에 성공했다는 극작가 겸 연극인의 체험기를 읽었다. 전공이자 생업으로는 도저히 최저생계비를 맞출 수 없어 경력을 감춰가며 미화원이 됐다는 것인데, 밥벌이의 엄중함을 아는 그의 ‘쿨’함이 씩씩하고 장할지언정 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본업인 예술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직업을 갖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책을 낼 수 있는 다양성의 시대에 이의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씁쓸함은 남는다. 자승자박, 어디다 대고 예술의 위기는 예술가의 위태로움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을 하겠는가.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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