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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기본적으로 노래… 장광설은 독자에게 혼란”

입력 : 2019-05-10 03:06:00 수정 : 2019-05-09 21: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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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위로 호랑무늬 깃을 펼치며/ 대지를 움켜쥔/ 나비가 날고 있다/ 대양 너머 저 멀고 먼 산언덕에서/ 작은 들꽃 무리들이/ 피었다/ 지면서/ 비바람 헤치고 찾아올 나비를 기다리고/ 구름 뒤의 달은/ 나뭇잎에 매달려 쪽잠 자며/ 고치에서 부활하는 영혼을 지켜보고 있다”

대를 이어 아메리카 대륙을 오르내리는 나비가 있다. 호랑무늬 날개가 화려한 이 ‘제왕나비’는 겨울을 나기 위해 캐나다 남부에서 멕시코 고원까지 5000㎞에 이르는 거리를 날아와 나뭇잎에 매달려 잠을 잔다. 멕시코인들은 망자의 영혼이 돌아왔다고 반긴다. 다시 봄 여름을 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고 또 내려오는 장엄한 생명의 ‘이어달리기’는 4대에 걸쳐 완성된다. 이들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머나먼 길을 한 치도 헤매지 않고 정확하게 오가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 나비가 최동호(71) 시인이 펴낸 여덟 번째 시집 ‘제왕나비’(서정시학)의 표제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생명의 신비로운 율동을 보여주는 이 나비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매개물이다. 나비가 이곳과 저 세상을 너울거리며 오가는 존재라면 빛과 어둠은 그 경계를 가르는 명백한 전선이다. 시인은 당연히 어둠 저편의 세계보다는 빛을 추구하는 쪽이다. 그가 이번 시집을 ‘나비’를 매개로 하는 ‘빛의 시집’이라고 명명하는 맥락이다. 그는 “반딧불이// 하나 잡은 아이의// 손에 가득한// 빛”(‘손’)에서 위안을 얻고, “하루 종일// 가을 햇빛만 한 움큼// 왔다가는// 툇마루에 고이는/ 눈물”(‘햇빛 한 움큼’)을 빛 속에서 보기도 한다. 이 빛은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번개’라는 시어로도 응축된다.

“먹구름 속에 불의 꽃봉오릴 터트린/ 천둥번개의 피는/ 노을 깊이 물들이는 저 하늘의 시// 번개가 큰 물고기 지느러미를/ 꼬리치던 산언덕/ 시든 갈대같이 말 없는 피뢰침// 휴짓조각 바람 타는 좁은 골목길/ 빈 구멍가게/ 깨진 유리창 전단지 빗방울// 납작 지붕에 찾아오던 번개를 삼킨/ 제라늄 꽃봉오리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이 살던 사람들의 시”(‘번개를 삼킨 제라늄’)

정년퇴직 전후에 쓴 시들을 숙성시켜 8번째 시집을 내놓은 최동호 시인. 짧은 ‘극서정시’를 지향해온 그는 “좋은 산문에도 미달되는 장광설을 읽으라고 하는 행위는 시인들 자신의 감성 배설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독자에게는 혼돈을 일으키고 시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빛의 칼날을 작은 제라늄 꽃봉오리가 삼켰다. 빛의 명령을 품고 사는 행위는 모든 생명들의 본질이다. 아슬아슬하게 생의 난간을 걸어가는 이들은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삶 그 자체로 시를 빚어낸다. 번개는 ‘빛의 편지’이기도 하다. “연못가에서 보낸/ 얼굴 없는 봄 편지 하늘가에/ 울고 있나 보다// 먹장구름 뚫고 번개가 지금/ 급히 전보 쳐서/ 길 잃은 아이를 찾고 있다”(‘얼굴 없는 봄 편지’) 지상에서 보낸 애타는 사연이 하늘가에서 천둥으로 울면 번개가 화급히 응답하는 동화적 상상력이 흥미롭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리 휘갈겨 쓰고 다녀도// 흔적 하나 없다// 흰 구름 낙서마저 지우고 가는// 소금쟁이”(‘소금쟁이 설법’)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아지랑이 살랑거리는 봄날 오후// 동자승 둥근 머리/ 파릇한 후광// 낭떠러지/ 야생화 가녀린 향기// 운판 소리 산 너머/ 구름 타고 목어가 난다”(‘목어가 난다’)는, 그가 이전 시집부터 이어온 선시(禪詩) 풍의 청량한 경지로 나아간다. ‘허공의 등짝’은 이 여정에서 발견한 장관이다. “허공의 등짝은 누가/ 때리고 가나// 죽비에 멍든 살 까맣게/ 멍들어가도// 하늘 한번 쳐다볼/ 겨를도 없이// 꼬리 잘려 뒤뚱거리는/ 올챙이 인간”(‘소낙비’)

평론과 시를 겸업했던 그는 고려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시작에만 몰두해왔거니와 이번 시집은 각별히 공들인 그 결실이다. 그가 10여년 전부터 주창해온 짧고 명징한 ‘극서정시’는 이번 시집에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아예 이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우주를 유영하는 점박이 별들의 악보// 세상살이 보듬어 푸른 달밤의 아리아// 언덕 위의 바람에 날리는 풀씨 한 점// 태양이 묘지에서 부르는 대지의 노래”(‘극서정시’) ‘별들의 악보’이고 ‘달밤의 아리아’라는 ‘극서정시’를 두고 최동호는 “시란 기본적으로 노래인데 시인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장광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요, 시 본연의 모습을 찾자는 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의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터지는 순간 사라지는 빛// 가장 열렬한// 첫사랑”(‘시’)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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