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위로 호랑무늬 깃을 펼치며/ 대지를 움켜쥔/ 나비가 날고 있다/ 대양 너머 저 멀고 먼 산언덕에서/ 작은 들꽃 무리들이/ 피었다/ 지면서/ 비바람 헤치고 찾아올 나비를 기다리고/ 구름 뒤의 달은/ 나뭇잎에 매달려 쪽잠 자며/ 고치에서 부활하는 영혼을 지켜보고 있다”
대를 이어 아메리카 대륙을 오르내리는 나비가 있다. 호랑무늬 날개가 화려한 이 ‘제왕나비’는 겨울을 나기 위해 캐나다 남부에서 멕시코 고원까지 5000㎞에 이르는 거리를 날아와 나뭇잎에 매달려 잠을 잔다. 멕시코인들은 망자의 영혼이 돌아왔다고 반긴다. 다시 봄 여름을 나기 위해 거슬러 올라가고 또 내려오는 장엄한 생명의 ‘이어달리기’는 4대에 걸쳐 완성된다. 이들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머나먼 길을 한 치도 헤매지 않고 정확하게 오가는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 나비가 최동호(71) 시인이 펴낸 여덟 번째 시집 ‘제왕나비’(서정시학)의 표제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생명의 신비로운 율동을 보여주는 이 나비가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매개물이다. 나비가 이곳과 저 세상을 너울거리며 오가는 존재라면 빛과 어둠은 그 경계를 가르는 명백한 전선이다. 시인은 당연히 어둠 저편의 세계보다는 빛을 추구하는 쪽이다. 그가 이번 시집을 ‘나비’를 매개로 하는 ‘빛의 시집’이라고 명명하는 맥락이다. 그는 “반딧불이// 하나 잡은 아이의// 손에 가득한// 빛”(‘손’)에서 위안을 얻고, “하루 종일// 가을 햇빛만 한 움큼// 왔다가는// 툇마루에 고이는/ 눈물”(‘햇빛 한 움큼’)을 빛 속에서 보기도 한다. 이 빛은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번개’라는 시어로도 응축된다.
“먹구름 속에 불의 꽃봉오릴 터트린/ 천둥번개의 피는/ 노을 깊이 물들이는 저 하늘의 시// 번개가 큰 물고기 지느러미를/ 꼬리치던 산언덕/ 시든 갈대같이 말 없는 피뢰침// 휴짓조각 바람 타는 좁은 골목길/ 빈 구멍가게/ 깨진 유리창 전단지 빗방울// 납작 지붕에 찾아오던 번개를 삼킨/ 제라늄 꽃봉오리는/ 바람 앞의 촛불 같이 살던 사람들의 시”(‘번개를 삼킨 제라늄’)
하늘에서 내리치는 빛의 칼날을 작은 제라늄 꽃봉오리가 삼켰다. 빛의 명령을 품고 사는 행위는 모든 생명들의 본질이다. 아슬아슬하게 생의 난간을 걸어가는 이들은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삶 그 자체로 시를 빚어낸다. 번개는 ‘빛의 편지’이기도 하다. “연못가에서 보낸/ 얼굴 없는 봄 편지 하늘가에/ 울고 있나 보다// 먹장구름 뚫고 번개가 지금/ 급히 전보 쳐서/ 길 잃은 아이를 찾고 있다”(‘얼굴 없는 봄 편지’) 지상에서 보낸 애타는 사연이 하늘가에서 천둥으로 울면 번개가 화급히 응답하는 동화적 상상력이 흥미롭다.
이러한 정서는 “아무리 휘갈겨 쓰고 다녀도// 흔적 하나 없다// 흰 구름 낙서마저 지우고 가는// 소금쟁이”(‘소금쟁이 설법’)로 이어지는가 싶더니 “아지랑이 살랑거리는 봄날 오후// 동자승 둥근 머리/ 파릇한 후광// 낭떠러지/ 야생화 가녀린 향기// 운판 소리 산 너머/ 구름 타고 목어가 난다”(‘목어가 난다’)는, 그가 이전 시집부터 이어온 선시(禪詩) 풍의 청량한 경지로 나아간다. ‘허공의 등짝’은 이 여정에서 발견한 장관이다. “허공의 등짝은 누가/ 때리고 가나// 죽비에 멍든 살 까맣게/ 멍들어가도// 하늘 한번 쳐다볼/ 겨를도 없이// 꼬리 잘려 뒤뚱거리는/ 올챙이 인간”(‘소낙비’)
평론과 시를 겸업했던 그는 고려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시작에만 몰두해왔거니와 이번 시집은 각별히 공들인 그 결실이다. 그가 10여년 전부터 주창해온 짧고 명징한 ‘극서정시’는 이번 시집에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아예 이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우주를 유영하는 점박이 별들의 악보// 세상살이 보듬어 푸른 달밤의 아리아// 언덕 위의 바람에 날리는 풀씨 한 점// 태양이 묘지에서 부르는 대지의 노래”(‘극서정시’) ‘별들의 악보’이고 ‘달밤의 아리아’라는 ‘극서정시’를 두고 최동호는 “시란 기본적으로 노래인데 시인 자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장광설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요, 시 본연의 모습을 찾자는 운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그의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터지는 순간 사라지는 빛// 가장 열렬한// 첫사랑”(‘시’)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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