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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달마 이후 최고 선승으로 떠오른 무상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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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5-06 21:16:27 수정 : 2019-05-06 21: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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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 / 쓰촨지방 정중종 사리탑 발굴 / 중국 마조의 스승으로 조명돼 / 한국 지성사 금자탑으로 충분

불기 2563 초파일을 앞두고 중국 쓰촨(四川)지방에서 정중종(淨衆宗)을 세웠던 무상선사(無相禪師)의 사리탑이 발굴됨으로써 그가 달마(達?) 이후 동아시아의 최고 선승(禪僧)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신라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특히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馬祖)의 스승으로 조명됨으로써 한국인의 불력이 동아시아를 이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의 수많은 견당유학승들은 당시 세계적 지성이었다. 동아시아에 이름을 드높인 승려들로는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 원측(圓測·613∼696), 의상(義湘·625∼702), 무상(無相·684∼762), 김지장(金喬覺·696∼794), 혜초(慧超·704∼787), 그리고 중국 선종사에서 4조 도신(道信·580∼651)의 수제자였던 법랑(法朗), 도의(道義)국사 등 구산선문의 승려들이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말이 유학승들이지 요즘으로 말하면 국내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박사후과정이나 교환교수로 당나라를 방문한 신분으로 보면 옳다. 이들은 국내에서 수계한 뒤 자신의 도량을 시험하고 넓히기 위해 당시 세계의 중심지인 당나라로 들어간 승려들이었다.

화엄사상을 신라에 처음 소개한 자장율사, 현장의 수제자로 유식경전의 번역을 도맡았던 원측, 해동화엄종의 초조가 된 의상, 중국 쓰촨지방에서 정중종을 일으킨 무상선사, 지장보살로 더 알려진 김교각, 왕오천축국전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혜초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꼽다 보면 동아시아 불교사가 중국과 신라 승려들이 공동으로 이룩한 것임을 알게 된다.

무상선사의 사리탑은 불교연구자인 최석환이 그의 열반지를 추적하던 중 중국 펑저우(彭州) 단장산(丹景山) 금화사(金華寺)의 김두타원(金頭陀園)에서 훼손된 채 확인했다. 무상선사의 사리탑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24기의 사리탑 중 정중앙에 모셔졌다는 사실도 금화사 스님들이 증언했다. 금화사는 무상스님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당 현종의 여동생인 금화공주가 스님에게 감화를 받아 자신의 금화행궁을 금화사로 조성케 한 것으로 밝혀졌다.

정중 무상선사는 중국 선종의 중흥조였으나 어둠속에 묻혀 있다가 돈황문서(1908년)의 발굴과 그것에 포함된 ‘무상오경전’에 의해 가까스로 빛을 보았다.

육조 혜능 중심의 중국 남종선의 법통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은 중국의 대문호이며 불교연구자인 호적(胡適·1891∼1962)이 처음 발설했다.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가 있던 서여(西餘) 민영규(閔泳奎·당시 연세대교수) 선생이 때마침 들른 중국의 호적선생을 만났고, 호적은 그에게 중국의 ‘보림전(寶林傳·801)’이 위서라는 경천동지할 얘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무상스님에 대한 복원작업은 필자가 세계일보 문화부 학술팀장으로 있을 때에 민 교수가 학술탐사를 제안(1990년)하여 세계일보 창간기념사업으로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성과는 세계일보가 발단이 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탐사과정은 ‘촉도장정(蜀道長征)’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다.

이에 앞서 2001년 무상이 오백나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한·중·일 불교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 쓰촨성 시방현의 나한사(羅漢寺·마조의 출가사찰), 윈난성(雲南省) 곤명의 공죽사(?竹寺), 항저우 영은사(靈隱寺), 베이징 벽운사(碧云寺), 장시성 노산 동림사(東林寺) 등 나한당에는 455번째 조사로 무상선사를 모시고 있다. 오백나한에 선승으로는 유일하게 달마대사가 307번째로 포함되어 있어서 선종의 맥이 달마에서 무상으로 전해졌음을 웅변하고 있다. 또한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은 851년 찬술한 ‘혜의정사사증당비(慧義精舍四證堂碑)’에서 무상-마조-무주-서당의 영정을 모셨다고 기록함으로써 이를 뒷받침했다.

육조혜능과 임제의현을 따르고 있는 한국불교계는 무상선사의 등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상선사의 발굴은 신라의 불교정신이 당시 세계적 수준이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한국불교의 최대 종단인 조계종은 육조혜능(六祖慧能·638∼713) 선사의 법통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인지 무상선사가 중국에서 나한이 된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부정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육조-남악회양-마조도일-백장회해-황벽희운-임제의현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따르는 세력이 주류이다. 조계종은 도의(道義·738∼821)와 보조지눌(普照知訥·1158∼1210)과 태고보우(太古普愚·1301∼1382)를 함께 섬기는 입장이다.

흔히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신라는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후진지역이었던 것으로 평가되지만 실은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에서 세계적 수준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신라는 육상실크로드와 해상실크로드를 통해 활발한 무역을 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인적 교류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전역을 무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통일을 이끈 원효의 화쟁(和諍)사상과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 등 자생불교철학과 사상들은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드높였다.

무상선사와 같은 대선사의 등장도 바로 이러한 지적 풍토의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일본학계는 무상선사의 존재를 확인했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으로 인해 숨겨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상선사의 발굴은 한국 지성사의 금자탑이 되기에 충분하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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