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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포부·국가 건설과제 ‘소비에트 몽타주’ 기법으로 융화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04-23 06:00:00 수정 : 2019-04-22 21: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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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예술영화·건국 프로파간다 사이, 영화 ‘해연’ / 조선영화 지속가능성 명제 앞 / 친일전력·이념갈등 뒷전으로 / 인적관계·기술전문성 중요시 / 건국 키워드 공유 영화 ‘해연’ / 이규환 감독 메가폰 잡아 / 상업적 노선 벗어나려 시도 / 멜로드라마적 설정·사건 속 / 건국시기 사회·가치 강조

◆조선영화에서 한국영화로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15일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까지 3년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여전히 ‘조선영화’로 불렸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조선영화(계)’란 명칭은 ‘한국영화(계)’와 여전히 혼용됐다. 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쓴 ‘조선영화’란 호칭이 단순히 용어의 차원이 아니라 꽤 복잡한 맥락을 품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해방 이후 한국이 ‘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은 국제 관계와 정치사회적 맥락에 기반한 결과였고, 영화계 역시 그 자장 안에 존재했다. 하지만 해방기 ‘조선영화’란 명칭은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영화 제작 경험을 지시하는 것이면서, 북한영화와 분리되고 한국영화로 다시 명명되기까지의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1948년 10월24일자 한 일간지에 실린 영화 ‘해연’의 광고. 맨 윗부분과 맨 아랫부분에 각각 ‘만난을 극복하고 곧 완성’, ‘예술영화사 거작’이란 문구가 보인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조선영화가 한국영화로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은 해방 정국 영화인들의 행보와 제작된 영화들의 경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어지럽게 진행된 좌우의 이합집산은 영화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임화, 김남천 등 좌익 진영이 주도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소속으로 1945년 9월24일 조선영화건설본부(영건)가 조직됐는데, 구성원은 일제 말기 국책영화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참가했던 영화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해 11월5일에는 추민 등 좌익 강경파의 주도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프로영맹)이 설립됐지만, 최고 지도부를 제외하면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참가한 기술 파트 영화인들이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12월6일, ‘영건’과 ‘프로영맹’은 ‘조선영화동맹’으로 통합되는데, 안종화가 위원장, 안석주와 이규환이 부위원장, 추민이 서기장을 맡은 것에서 역시 이념 성향과 밀착되지 않은 인선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좌익 계열 단체에 참가한 영화인 면면에서 엿볼 수 있듯이, 친일 부역 전력이나 좌우 이념 갈등은 조선영화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가란 근본적인 명제 앞에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영화 작업의 특성상, 인적 관계나 기술적 전문성이 더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다.

1946년 9월 이규환이 연출한 아동극 ‘똘똘이의 모험’이 해방 후 첫 영화로 개봉했고, 10월에는 최인규의 연출과 전창근의 각본과 주연으로 완성된 ‘자유만세’가 ‘해방 경축 영화’로 그 뒤를 이었다. 대중영화이지만 프로파간다로서의 성격을 담지한 두 작품 모두 일제 강점 말기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영화인들이 참가했다. 괴기물 ‘목단등기’(김소동·1947)처럼 순수한 오락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최은희의 영화배우 데뷔작 ‘새로운 맹서’(신경균·1947)처럼 건국 서사를 멜로드라마 화법에 담아낸 영화들이 선보였다. 조선해양경비대의 지원을 받은 ‘바다의 정열’(서정규·1947)을 위시로,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밤의 태양’(박기채·1948) ‘수우’(안종화·1948) 등도 정부 수립 직전 속속 공개됐다. 가장 대중적인 범죄 액션 장르를 빌려 밀수 근절을 선전하는 영화들이었다. 또 계몽문화협회를 주축으로 ‘의사 안중근’(이구영·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1947) 등 일제강점기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극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 및 국민 만들기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규환의 ‘해연’(海燕·일명 갈매기·1948)도 이 같은 해방기 영화 제작 경향을 공유하지만, 순수한 예술영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해연’의 주인공 수길과 정숙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건국 도상의 예술영화 운동

‘해연’은 1947년 말 촬영을 시작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완성됐고,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영화로 인정받아 11월21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다. 그해 12월 부산 상영 중 당국에 의해 프린트가 압수됐는데, 영화에 출연한 박학과 유경애가 월북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두 배우는 1949년 북한 최초 극영화 ‘내고향’에 출연하는 등 그 이후 북한에서 활동했다. 사라진 것으로 여겼던 ‘해연’ 필름은 2014년 9월 한국영상자료원이 일본 고베영화자료관에서 발굴했고, 개봉한 지 60년도 훌쩍 지난 2015년 7월 다시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 필름이 일본에 있었던 건 당시 일본 오사카부의 재일조선인단체에서 수입을 진행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해연’을 만든 예술영화사는 동인제 성격의 영화사로 프로듀서 이철혁, 각본의 이운룡 등 주로 연극 무대 출신의 인력들이 주축이었다. 촬영 현장은 김동규 등 배우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이 주축이 됐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한 이규환이 연출을 맡았고, 촬영 양세웅, 녹음 이필우 등이 참가했다. 원래 감독으로 섭외됐던 김영화는 공보처 영화과장으로 취임해 ‘해연’의 예술 지향과 정치적 실천에 지지를 보낸다.

예술영화를 수행하는 주체로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던 이규환이 선택된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는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을 연이어 개봉하며 해방기 영화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그 역시 친일 행적에서 자유롭지 않았지만, 일제 말기 국책영화사에 소속되지 않고 평택 비행장에서 징용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은 것이 일종의 면죄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 협력에 대한 부채감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개인의 판단과 영화계의 일치된 평가가 해방 이후 활발한 행보가 가능했던 배경인 것이다.

영화사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예술영화사가 예술영화 운동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는 ‘해연’의 착수 시점과 완성 시점에 발간된 잡지 『예술영화』와 『해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영화가 범람하는 가운데 한국영화는 상업적 노선만 취하는 해방기 상황에서, 그들은 예술영화에 관한 이론적 고찰과 실천을 모두 겨냥하며 잡지와 영화를 동시에 내놓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야 하는 바로 그때, 그들의 작업은 오롯이 예술영화로만 수렴될 수 없었다.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이 노동하는 영화 ‘해연’의 장면. 이규환 감독의 예술적 포부와 국가 건설이란 과제가 프로파간다 원조라 할 소비에트 영화의 몽타주 기법으로 구현됐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소비에트 몽타주로 구현된 건국 프로파간다

‘해연’은 첫머리부터 건국 도상의 한국 사회와 민중들이 체현해야 할 가치들을 강조한다. 정애(남미림)가 혼란한 정국을 틈타 모리배 짓을 일삼는 연인 철수(박학)와 이별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감화원으로 떠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어 영화는 불량소년들을 모아 계도하는 감화원(실제 촬영은 부산 수영소년학교)을 배경으로 새로운 국민 만들기를 설파한다. 그리고 계모 때문에 가출해 불량소년이 된 수길과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를 찾아온 정숙(조미령)이 남매처럼 가까워지는 설정을 통해 멜로드라마적 사건을 만들어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비에트 몽타주’ 기법을 활용하는 것이다. 바로 감화원 실습지에서 원생들이 노동하는 장면이다. 시나리오에 적힌 “괭이로 파는 소년, 삽으로 흙을 떠 던지는 소년들!/ 박 선생과 정애도 같이 일을 한다/ 정애의 고운 얼굴에 구슬 같은 땀방울!/ 소년들의 합창소리!/ 하늘에 나는 갈매기!/ 멀리 반짝거리는 황금빛 바다물결!”은, 영화에서 웅장한 남성 합창단의 노래를 배경으로 선생과 원생들이 황무지에서 곡괭이질 하는 모습과 세찬 파도의 쇼트가 리듬감 있게 병치되는 것으로 영상화된다. 감독의 예술적 포부와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가 프로파간다 원조라 할 소비에트 영화의 몽타주 기법으로 구현된 것은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해방기에서 6·25전쟁기로

오리지널 영화음악을 사용하는 등 ‘해연’이 개척한 예술성은 ‘마음의 고향’(윤용규·1949)과 ‘푸른 언덕’(유동일·1949) 같은 작품으로 이어졌고, 1949년 한국영화계는 20편에 달하는 작품을 내놓으며 제작 환경이 안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시련은 다시 찾아왔다. 6·25전쟁 발발로 모든 영화 제작은 멈출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인들은 1·4후퇴 뒤 국방부 촬영대 등 군관에 소속돼 기록영화 활동을 이어나간다. 또 1952년 이후 피난도시 대구 등지에서는 ‘태양의 거리’(민경식·1952) 같은 극영화가 제작돼 극장으로 사람들을 모았다. 전쟁 중 영화인들의 제작 활동은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가 대중문화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기반이 됐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연구전시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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