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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라 억울한 적? 너무 많아 셀 수도 없어요”

입력 : 2019-04-12 10:00:00 수정 : 2019-04-12 11: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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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세계] 임산부는 특권층?
임산부석. 연합뉴스

“오늘도 어떤 남학생이 임산부석에 앉아 있어 40분 내내 서서 왔다.”

 

평소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임산부 A(31)씨가 불만을 털어놨다. 그는 “분명 가방에 달린 임산부 배지를 봤는데도 (승객이)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더라”며 “이런 일이 너무 많아 놀랍지도 않다. 못 앉는 경우가 허다한데도 임산부 배려석(이하 임산부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임산부는 혜택을 받는다’고 오해할 때가 많다”고 억울해했다.

 

‘출산율 0.98명’. 2018년 기준 세계에서 사실상 유일한 ‘출산율 1명대 미만’ 국가라는 오명을 얻으면서 정부가 출산 장려 방안이 고심하고 있다.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 흐름에 출산 장려는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그 어느 때보다 아이가 귀해진 지금, 과연 임산부는 그만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세계일보가 만나 본 임신 경험자들은 “전혀 아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은 “마치 임산부가 특권층인 것처럼 비치지만 실상 배려받지 못할 때가 훨씬 많다”고 입을 모았다. 생활 곳곳에 임산부에 대한 혐오가 스며들어있다는 것이다.

 

◆“임신해서 뭐? 어쩌라고?” 고성에 얼굴 새빨개지기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임산부를 배려하기 위해 만든 임산부석이지만, 정작 임산부 10명 중 8명은 임산부석 이용에 불편을 느낀 것으로 조사됐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지난해 1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출산 경험이 있는 20~40세대 임산부 총 4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중교통 임산부석 이용에 불편을 느꼈다’는 응답이 88.5%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이 착석 후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58.6%)였으며 ‘임산부석이 모자라서(자리가 없어서)’가 15.5%로 뒤를 이었다.

 

임산부 배지를 단 가방을 멘 임산부. 나진희 기자

결혼 2년 차 주부 B(30)씨는 며칠 전 지하철에서 겪은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불쾌하다. B씨는 “임산부석에 앉은 아저씨가 임산부 배지를 달고 서 있는 날 보더니 ‘임신해서 뭐? 어쩌라고?’ 하며 화를 냈다”며 “순간 사람들 이목이 쏠렸고 마치 내가 임산부라고 유세라도 떤 것 같아 얼굴이 빨개졌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내릴 곳도 아니었는데 그 다음 역에서 바로 내렸다. 왠지 서러워 눈물이 찔끔 나더라”며 속상해했다.

 

만원 지하철을 타다 곤란을 겪은 적도 많다고 했다. B씨는 “임신 32주차 만삭인 상태에서 지하철 9호선을 타고 출근한다. 아침마다 지하철 안이 가득 차도록 승객이 밀려드는 통에 배가 눌릴까 봐 손으로 배를 감싸고 전전긍긍한다”며 “얼마 전엔 전동차 안에 사람이 가득 찼는데도 내 뒤에서 한 할아버지가 계속 ‘더 들어가라’며 밀어대는 통에 큰일 날 뻔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다행히 주변 승객들이 ‘그만하시라’고 말해줘 위기를 넘겼지만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니 쌀쌀한 날씨에도 땀이 흥건했다고 했다. 이어 “그렇다고 매일 택시를 탈 수도 없으니 육아휴직일만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임산부가 ‘민폐’를 끼친다는 인식도 문제라고 했다. 임신 32주차 직장인 C(30)씨는 “출산이 가까워져 오니 몸이 무거워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찬다. 당연히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며 “아침 출근 시간 서울 광화문역 계단을 올라갈 때면 느린 내가 답답한지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짜증 섞인 한숨이나 욕설을 들을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비오는 날엔 성질 급한 사람들이 일찍부터 뒤에서 우산을 펴 등 뒤가 흠뻑 젖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C씨는 “급한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하나 (배려를 좀 해주지 않아)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고 밝혔다.

 

임산부 배지

◆티 안 나는 초기 임산부... 배려 없는 직장 문화에 유산까지

 

겉으로 임신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들은 눈칫밥을 먹을 때가 더 많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복직을 앞둔 주부 D(35)씨는 “임신 초기 때 임산부석에 앉으면 사람들이 힐끗거렸다”며 “그게 싫어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가거나 괜히 ‘저 임산부예요’라는 느낌으로 배를 쓰다듬기도 했다. 임산부석에 앉으려면 남들 눈에 전형적인 임산부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럽다”고 전했다.

 

5년 차 직장인 E(29)씨는 임신 초기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로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그는 “부서장에게 임신했다고 하니 ‘축하한다’면서도 ‘근무 문제로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 주지 말라’는 식으로 말해 서러웠다”며 “결국 당직과 야근을 모두 서야 했다. 그 때문인지 몸이 너무 안 좋아져 임신 2개월 만에 유산하고 말았다”고 털어놨다. E씨는 일주일 유산 휴가 후 ‘쉴 만큼 쉬지 않았냐’는 상사의 말에 다시 당직과 야근을 서야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임산부 조롱... 성적 모욕도

 

피해를 경험한 여성들은 임산부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느낀 바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임산부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낸 사례도 있다. 지난 2월18일 서울메트로에 따르면 오후 11시쯤 지하철 4호선 한 전동차 객실에서 임산부석 위에 붙은 마크에 ‘X’자를 그어놓은 낙서가 발견됐다. 그런가 하면 노약자석 스티커에서 임산부, 자녀와 함께한 여성 마크에만 X자를 쳐놓은 낙서도 있었다.

 

일베에 올라온 임산부석 ‘인증글’.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X’자가 그어진 임산부석과 노약자석.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일간베스트(일베)’ 등 극우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임산부를 향한 인신공격과 성희롱이 이미 도를 넘었다. 일베에는 남성이 임산부석에 앉은 후 사진을 찍어 올리는 ‘임산부석 인증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젊은 여자들이 안 앉고 일부러 비워두길래 얼른 임산부석에 앉았다’, ‘임산부석 5번 앉은 인증글’, ‘(일반인이 못 앉도록 임산부석에 비치해놓은) 인형을 안고 앉았다’ 등의 조롱글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얼마 전엔 임산부석에 앉은 임산부의 얼굴을 모자이크 없이 올리고 ‘피임기구 없이 성관계했다는 인증’ 내용이 알려져 성희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일부의 임산부 혐오 현상에는 약자를 향한 ‘편 가르기’ 문화가 있다고 꼬집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통화에서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사람들이 약간의 불편함이나 억울함도 참기 어려워진다”며 “자신이 힘드니 임산부 등 약자가 받는 혜택을 ‘특별대우’라 여기고 이를 못 참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곽 교수는 또 “자신이 힘든 것을 약자를 상대로 분풀이하는 행동을 ‘전위적 공격행동’이라 하는데, 임산부석 테러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약자에 대한 배려를 어릴 적부터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곽 교수는 “우리나라는 ‘편 가르기’ 문화가 지나치다. 장애인이나 저소득층 등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몸에 익도록 어릴 적부터 교육을 강화하는 동시에 편견을 없애고 베풂의 즐거움을 느끼는 문화 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진희 기자 na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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