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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만 허술한 한국 요괴… 해학적 상상력 산물?

입력 : 2019-03-23 02:00:00 수정 : 2019-03-22 19: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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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서 전해지는 귀물 ‘그슨새’ / 어린이들 신발 훔치는 ‘야광귀’ 등 / 고문헌·민담에 등장 요괴들 정리 / 역사적 인물과 함께하는 요괴도
고성배 지음/위즈덤하우스/2만2000원

한국요괴도감/고성배 지음/위즈덤하우스/2만2000원

 

현용준의 ‘제주도 민담’은 ‘그슨새’ 목격담을 전한다. 1959년 8월에 조사한 것인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한 농부는 친구가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발견했다. 소의 고삐를 풀어 자기 목에 묶고는 조였다 풀었다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삐 줄을 가지고 비자나무로 가는 걸 보고 큰 일이 나겠다 싶어 친구를 정신차리게 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우장(비를 맞지 않기 위해 입는 도롱이) 닮은 놈이 공중에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 자기 목에 줄을 걸고 당기고 놓고 했다고 한다.”

제주도의 민간에 전해지는 귀물 그슨새는 사람의 마음을 조정해 근처의 줄을 찾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다.

요괴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이란 이런 소름끼치는 모습 혹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다 그런 건 아니다.

‘한국요괴도감’은 다양한 문헌, 민담 등에서 찾은 한국의 요괴들을 소개한다. 공포감을 극대화한 것들과 함께 어딘가 허술해 친근감마저 드는 요괴들도 있다. ‘한국요괴도감’에 실린 야광귀, 어둑시니의 이미지(왼쪽부터). 위즈덤하우스 제공

‘야광귀’는 어린아이의 신발을 즐겨 훔친다. 그런 일을 당하면 재수없는 한 해를 보내게 된다. 이 놈은 숫자를 넷까지밖에 못 세는데 이상한 승부욕이 있어 자신이 수를 잘 센다고 생각한다. 야광귀를 막으려면 이런 특징을 이용하면 된다. 촘촘한 채를 문밖에 걸어두면 채의 구멍을 세다 아침이 되어 도망간다는 것.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어리숙함에 친근감이 들 정도다.

‘삼국유사’, ‘용재총화’ 등의 고문헌과 민담, 소문 등에 등장하는 한국의 요괴들을 정리한 책이다. 어릴 적 즐겨 읽던 요괴를 소재로 한 일본 만화책을 보며 “우리나라에는 이런 요괴가 왜 없을까” 생각했다는 저자는 수많은 책과 각종 자료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독특한 개성을 가진 괴물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저자는 나름의 기준으로 요괴를 구분했다. 육신이 존재하며 짐승 혹은 사람을 닮은 ‘괴물’, 혼백이거나 자연의 정기에 의해 만들어진 ‘귀물’, 독특한 능력을 갖춘 ‘사물’,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 한 ‘신’ 네 가지다. 기린, 해치, 저승사자, 자명고 등 익히 알려진 것도 있으나 낯선 것들이 많아 흥미롭다.

야광귀처럼 어딘가 허술한 요괴들이 적지 않다. ‘어둑시니’는 눈길을 주면 점점 커져 사람을 뭉게 죽인다. 재밌는 건 퇴치방법이다. 어둑시니가 커질 때 올려보지 않고 발 쪽을 내려다보면 반대로 점점 작아져 사라진다는 것. 모른 척 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은요불’은 어린 아이만 한 크기의 요상한 불상이다. 저녁이 되면 흰옷 입은 승려도 변하는데 사람을 무서워한다. 앞에서 크게 인기척을 하면 달아난다고 하니 요괴라고 부르기엔 귀염성이 짙다. 이런 요괴들은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적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 아닐까.

장산범의 이미지

역사적 인물과 함께 등장하는 요괴들도 있다. 수양대군의 최측근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신숙주와 한명회의 이야기가 나란히 등장한다. ‘어우야담’에 신숙주와 ‘거구괴’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거구괴는 위, 아래 입술이 하늘과 땅에 닿을 정도로 입이 어마어마하게 큰 괴물로 입안에 들어가면 길흉화복을 맞히는 청의동자를 만날 수 있다. 신숙주는 과거를 보러 가던 길에 거구괴를 만나 도움을 받았다. 역시 어우야담에 전하는 한명회의 이야기는 좀 더 끔찍하다. 정강이뼈 안에 벌레가 들어 아픔을 참지 못하게 된 한명회는 죽기를 각오하고 정강이뼈를 부러뜨렸다. 부러진 뼈에서 골수가 흘러내리는데 그 속을 더듬어 보니 엄지손가락만 한 벌레가 있었다. 벌레를 펄펄 끓는 기름에 넣고 죽인 뒤 한명회도 세상을 떠났다. 출세와 죽음을 요괴와 연관시킨 건 두 사람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평가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과학이 자연계, 인간계에 대한 설명의 기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20세기에도 새로운 요괴는 등장했다. ‘도시전설’로 전해지는 ‘장산범’은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라는 사이트에서 이슈가 돼 약 30건의 목격담이 줄을 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나 자연물의 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특징이다. 부천, 정선, 공주 등 전국 각지에서 목격되었는데, 특히 부산 장산에서 자주 출몰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요괴란 상상력의 산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이들의 상상이 보태져 책에 소개된 요괴들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이 새로운 상상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서문을 마무리했다.

“이제 이 책의 뒷이야기는 그대들에게 달렸다. 이 괴물들이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새로운 신화를 써주길 바란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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