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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소학교 학생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민낯 [한국영화 100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입력 : 2019-03-19 06:00:00 수정 : 2019-03-19 17: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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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영화 ‘수업료’ / 조선인 어린이의 글짓기 수상작이 원작 / 넝마주이 할머니와 사는 4학년 학생의 / 학교 수업료 내기 위한 고군분투 다뤄 / 제작자 이창용, 日 본토 시장까지 염두 / 시나리오·촬영 등 핵심 작업 日과 협업 / 조선 민간영화사 열악한 현실도 보여줘

◆‘로컬 컬러’에서 시국 반영한 주제로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반 조선영화의 제작 경향은 로컬 컬러의 시도와 일본 영화시장에서의 좌절, 시국을 반영한 주제로의 방향 전환으로 분석된다. 이 시기 조선영화는 더 이상 조선 내 시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고, 일본과 만주 등지 상영을 통해 수익을 거둘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획 전략이 됐다. 하지만 조선의 향토색을 내세운 ‘어화’(1938), ‘한강’(1938) 등이 일본 관객들의 관심을 받는 데 실패하자, 조선영화계는 일제 당국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향을 모색한다. 마침 일본의 영화평론가들도 조선영화가 로컬 컬러, 즉 이그조티시즘(이국 취향)의 전시에 주력한 것이 오히려 패착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 주목받은 게 고려영화협회가 기획한 ‘수업료’(1940)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당국의 글짓기 공모에서 수상한 한 조선인 어린이가 쓴 작문이었다. 고려영화의 이창용(사진)은 원작의 어떤 점을 포착해 일본 시장에서 통용될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영화 ‘수업료’ 세트 촬영 중인 고려영화협회의 남대문촬영소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영화 ‘수업료’의 제작 과정


이창용은 조선 최고의 영화기업가를 꿈꾸던 인물이다. 그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는 1935년 발성영화 ‘춘향전’의 전국 흥행으로 배급업에 안착했고 1936년부터 영화 제작을 모색, 1938년 하반기부터 창립작 ‘복지만리’에 착수한다. 만주영화협회와 제휴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제작이 늦어져(1941년 완성)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9)를 먼저 만들어 흥행에 성공했다. 다음으로 진행한 영화가 바로 ‘수업료’다. 시국적 소재를 취한 이 영화는 기획 단계부터 일본과 만주 등지에 진출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영화의 원작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소학생 대상 신문인 경일소학생신문 글짓기 공모에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상을 받은 광주 북정공립심상소학교 4학년 우수영 어린이의 작문이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때는 1939년 3월, 작문집이 발간된 때는 1939년 6월이다. 영화 역시 6월에 바로 착수된 것에서 당시 원작 작문이 크게 화제가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업은 3월 수상이 결정된 직후 바로 착수됐는데, 일본영화계의 중견 시나리오 작가 야기 야스타로(八木保太郞)가 맡았다.

제작자 이창용은 일본 본토 시장에 통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우선 일본영화 식의 시나리오를 취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는 일본인 작가에게 맡겨 무난하게 검열에 통과한 뒤, 연출과 촬영은 안정 구도에 오른 조선영화계에서 맡고 여전히 취약했던 후반 작업과 일본 개봉을 위한 일본어 자막 작업은 일본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영화화를 위한 연출은 조선인 감독의 역할이었고, 세트 촬영은 고려영화의 남대문촬영소에서 진행됐다. ‘국경’(1939)으로 인상적인 감독 데뷔작을 선보인 최인규가 대부분의 촬영을 진행했고, 와병으로 빠진 뒤에는 방한준 감독이 남은 촬영분을 마무리했다. 사실 최인규의 와병은 스타 여배우 김소영과의 스캔들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사건의 후일담으로 짐작해 보면, 방한준의 합류 시점은 소년 영달의 여정 장면부터일 가능성이 크다. 시나리오에서는 영달이 주막에서 김소영이 맡을 예정이었던 여성 예인과 마주치는 장면이 있는데, 전문 배우처럼 보이지 않는 여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편집을 포함한 후반 작업은 회복한 최인규가 진행했다.

영화 ‘수업료’에서 돈이 없어 수업료를 낼 수 없는 영달과 친구들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병든 할머니와 힘들게 살아가는 영화속 어린 영달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식민지의 현실을 노출한 영화

영화는 수원의 한 소학교 4학년 학생 영달(정찬조)이 넝마주이를 하는 할머니(복혜숙)와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행상을 나간 부모는 반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영달은 수업료도 내지 못하고, 집주인(독은기)에게 밀린 집세까지 독촉받는 형편이다. 담임인 일본인 다시로 선생(스스키다 겐지)이 영달의 집을 방문해 돈을 놓고 가지만 이마저도 집주인에게 뺏기고 만다. 결국 영달은 수업료를 구하기 위해 홀로 평택 큰어머니 댁까지 긴 여정을 떠난다.

이 영화의 표면적 이야기는 조선인 학생이 수업료를 내고 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다. 조선에서의 검열은 무난히 진행됐고 1940년 4월30일 경성의 일본인 거리 남촌의 메이지자(明治座)와 대륙극장(구 단성사)에서 동시 개봉, 좋은 성적을 거둔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개봉은 예술영화배급사인 도와상사에 의해 5월부터 추진됐고 수차례 시사회도 열렸지만 정식 개봉되지는 못했다. 아동영화임에도 일본 문부성에 의해 14세 미만은 보지 못하는 ‘비일반영화’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문부성 입장에서 식민지 조선에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궁핍한 학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영화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당시 조선인 소학교는 일본 본토와 조선의 일본인 학교와 달리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영화는 반드시 수업료를 내고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일제의 국책 이데올로기를 반영해 만들었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가난으로 인해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어린 소학교 학생의 힘든 상황이 부각됐다. 특히 일본어 시나리오가 조선영화로 연출돼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는 애초의 목적에 균열이 생겼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정도 언급할 수 있다. 먼저 유치진이 쓴 한국어 대사가 영화에 반영되면서, 일본어만의 대화가 실린 시나리오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낸다. 친절하지만 한국말을 모르는 다시로 선생에게 할머니는 “어린 것이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힘겹게 말한다. 한국어로 발화되는 순간의 호소력은 일본어와 전혀 다른 것이다. 또 영달이 수업료를 구하기 위해 수원에서 평택 큰어머니 댁까지 60리 길을 걸어가는 것을 해낸 것은, 원작의 ‘인고단련’의 경험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배운 군가인 ‘애마진군가’를 부름에도 결국 울어버리고 마는 한 조선 어린이의 고달픈 여정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영화는 이 시기의 다른 조선영화들처럼 훌륭한 일본인 남성이란 역할을 활용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부모와 영달이 다시 결합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그 효과를 축소시킨다.

영화 ‘수업료’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조선영화 텍스트가 복잡한 스펙트럼을 내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당시 조선영화인이 영화를 만든다는 건 기본적으로 일제 당국의 허락 아래 성립될 수 있었다. 단순히 친일과 저항의 구도로만 본다면 이 시기의 다층성을 파악하기 힘든 것이다. ‘수업료’, ‘집 없는 천사’(1941)로 이어지는 최인규의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감독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식민지적 현실은 어떻게든 영화 텍스트에 반영되기 마련이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지도력에 균열을 내는 형태로 조선 관객들과 만났다. 특히 ‘수업료’의 장면처럼, 일제의 국책에 어떻게든 부응하려는 한 조선 소년을 묘사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조선인 가정의 비루한 삶이, 조선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전시 체제로 진입한 조선영화

1940년을 전후로 조선영화는 일본영화계와 협업하고, 조선총독부 당국과 적절히 협상해 가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제작 궤도에 오른 듯 보였지만, 이는 조선영화인들의 희망이 과도하게 앞선 탓에 그들에게 일종의 착시감을 준 것이었다. 조선영화계는 자본도 기술도 기구도 여전히 빈곤했고, 특히 ‘수업료’, ‘집 없는 천사’ 같은 고려영화협회의 제작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시장에서의 흥행도, 제국 일본의 영화로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시기 조선의 민간 영화사들은 당국의 국책영화 시스템 속으로 급속히 재편돼 갔다. 민간의 영화 제작은 불가능해졌고 1942년 9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란 국책영화사로 강제 통합됐다. 또 다른 의미의 ‘조선영화’가 출발한 것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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