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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아직도 먼 우리 말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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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3-10 23:33:12 수정 : 2019-03-10 23: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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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층 한글 파괴 신조어 남발 / 정치인들은 지나친 ‘한자 사랑’ / 일제속 우리말 어떻게 지켜왔나 / 선조 얘기 담은 영화 가슴 뭉클

라덴, 넹글넹글, 띵문머, 괄도네님띤. 무슨 뜻일까.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10, 20대 사이에서 쓰이는 ‘야민정음’의 예시다.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 야구갤러리에서 시작한 것으로 ‘야구갤러리+훈민정음’을 줄여서 이렇게 쓴다. 40대 이상은 대부분 알 수 없는 단어다. 알고 보니 라면, 빙글빙글, 명문대, 팔도비빔면이다. 기존 단어를 비슷한 모양의 다른 글자로 변형해 쓰는 이런 신조어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괄도네님띤은 한 식품회사가 젊은 고객의 언어 취향에 맞춰 작명했다. 튀는 상표 덕에 더 잘 팔린다고 한다.

다른 기업들도 장삿속으로 앞다퉈 어이없는 우리 말글 파괴에 가세하고 있어 한글단체에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말지키기운동본부는 최근 “젊은 층에서 유행되는 출처 불명의 말들은 집단의 은어로 봐주기에는 도가 넘고 있다. 게다가 SNS상에서 급속히 확산하는 만큼 문화체육관광부 등 당국이 적절히 제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젊은 층과 이들을 겨냥한 기업들의 우리말 훼손이 도늘 넘어도 한참 넘고 있는 셈이다.

박태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정치인들의 지나친 한자 사랑도 우리 말글의 설 자리를 위협하기는 매한가지다. 얼마 전 미국에 간 문희상 국회의장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 ‘萬折必東(만절필동)’이라 쓴 족자를 선물했다. 족자에는 한글은 단 한 자도 없었다. ‘황허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들어간다’는 만절필동의 의미가 외교무대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논란도 제기됐다. 더욱이 만절필동은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주중 대사 시절인 2017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신임장 제정에 앞서 방명록에 쓰는 바람에 구설에 오른 바 있다. 역사에서 쓰인 배경과 맥락을 알면 외국에서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게 중론이다.

지난 대선 운동 기간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5·18 민주묘지 방명록에 滅私奉公(멸사봉공)을 滅死奉公(멸사봉공)으로 잘못 적었다가 다시 작성했다. 사회 지도층들이 하나같이 쉽고 편한 우리 글을 두고 굳이 한자어를 고집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한자를 쓰면 ‘있어 보여서’ 그런가. 정신을 못 차린 사대(事大)라는 비난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 교포 김은주 박사(전 뉴욕한인교사회 회장)는 SNS에서 우리말을 외면하는 행태를 지적했다. “왜 자기 것을 사랑할 줄 모를까 하고 혼자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나는 영어권에서 생활하며 미국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사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외래어, 특히 영어를 섞어 쓰는 걸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우리말 외면 세태를 꼬집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 창식이가 굳이 테드 창으로 불리길 고집하는 것이 줏대없는 우리의 참모습이 아닐까.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북한은 좀 다른 것 같다. 의학용어만 봐도 그렇다. 치통은 이쏘기, 복통은 배아픔, 요통은 허리아픔 ,야맹증은 밤눈 어둠증, 우울증은 슬픔증이라고 한다. 외국어를 고유어로 대체하고 고유어가 없을 때는 그 뜻을 풀어쓴다. 영화 ‘말모이’는 일제시대 우리 말과 글을 빼앗긴 시절의 절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선조가 우리말과 글을 어떻게 지켜왔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극중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의 “말은 민족의 정신이고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는 일갈은 지금도 귓전에 맴돈다.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끝까지 지켜온 우리 말글의 소중함을 새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한평생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서온 우리말살리기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는 “우리 말글살이가 어지럽게 되면 나라가 휘둘린다”며 “무분별한 한자어와 영어로부터 우리말글의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새겨들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말글을 외면하는 데 누가 우리의 것을 지켜주겠나. 나라의 지도자들이 앞장서 한자를 자랑삼아 써대니 시진핑 주석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닐까. 3·1 독립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운 지 100돌 되는 올해 우리 말과 글이 제대로 독립했는지 옹골차게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태해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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