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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기생 30여명 이끌고… 일제 경찰서 앞에서 “만세” 부른 강심장

입력 : 2019-03-04 21:06:19 수정 : 2019-03-04 21: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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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만세시위 주도한 ‘맏언니’ 김향화/검무·승무·가사·시조 등 능한 ‘팔방미인’/18세 이혼 후 가족부양 위해 기생의 길/
시위 직후 검거돼 6개월 동안 옥고 치러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 중에는 여학생과 교사, 전도부인 이외에 기생도 있었다. 진주·수원·해주·통영 등 전국 곳곳에서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나섰다. 첫 기생시위는 진주에서 일어났는데, 3월 19일 진주 기생독립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수원에서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 3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고, 4월 1일에는 해주에서 읍내 기생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튿날인 4월 2일 통영에서도 기생시위가 있었는데, 통영 예기조합(藝妓組合) 기생들이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 4필 반을 구입해 만든 소복 차림으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를 주도한 수원 기생, 김향화

김향화(金香花)는 수원의 기생 만세시위를 주도한 여성이다. 조선의 기생들을 소개해 놓은 ‘조선미인보감(1918)’에 따르면, 김향화는 검무, 승무,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등에 능하였다. 서울 출생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 부양을 위해 기생이 되어 수원기생조합에 소속되었다. 3·1운동 당시 23세로 조합 기생들의 맏언니 역할을 하였던 김향화는 30여명의 기생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가하였고,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이끌었다. 김향화와 기생들은 시위에 쓰기 위해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였고,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慈惠病院)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시위 직후 김향화는 주모자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이 선고돼 옥고를 치렀다. 김향화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더 이상 알려진 바는 없다. 

1918년 발간된 조선미인보감에 실린 기생 김향화 소개 글과 사진.
◆기생들이 만세시위에 적극 나선 까닭은?

물론 기생들도 조선 사람인 만큼 일제에 대한 반감이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민족감정이라는 일반적인 설명 외에도 기생들의 저항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896년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 철폐로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생들은 조선시대와는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마침 조선을 장악해 들어오기 시작한 일제는 일본식 공창제를 도입하기 위한 조치로 1909년 창기단속령과 함께 기생단속령을 공포하였다. 기생을 창기처럼 통제하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 기생들은 허가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고 의무적으로 기생조합에 가입해야만 했다. 더욱이 창기처럼 매월 1회 성병검사를 받는 것도 의무화되었다. 이전에는 자유롭게 탔던 가마도 탈 수 없게 되었고, 기생만의 전유물이었던 빨간 우산이 창기에게도 허용되었다. 예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던 기생들은 정기적으로 성병검사를 받고 창기처럼 취급당하는 것을 모욕으로 간주했다. 누구보다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이 켜켜이 쌓여 갔을 것이다. 1918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기생들이 헌병출장소에 출두하여 “남에게 살을 내어 보이는 것은 비상한 치욕”이라며 성병검사의 폐지를 청원하였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기생들의 지위 하락은 단순히 식민정책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말 이래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기생은 민족 내부에서도 봉건적인 잔재이자 사회악이라 비난받았다. ‘부벽루’ 등 1910년대 신소설에서 기생은 대부분 남성을 유인하여 돈을 빼앗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탐욕스러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와 같이 자신들을 천시하는 대중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기생들은 오늘날로 치면 재능기부와 금전적 기부를 통해 여학교 설립 운동, 국채보상운동, 사회사업 등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하며 일찍부터 공적 활동을 통해 사회적 인정을 얻고자 노력했다. 기생에게 만세시위 참여는 일제의 통제정책에 대한 불만의 표출인 동시에 주변인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서구가 기생들의 3·1운동을 회고하면서 기생들이 “우리도 대한의 딸이요,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 묻힐 백성의 한 사람이다. 직업이 천하다고 무작정 멸시는 말라”며 시위에 나섰다고 설명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09년 4월 고인에게 추서된 독립운동표창과 약장.
자료 수원박물관
◆시위대를 선동하는 역할

흥미로운 것인 3·1운동에서 기생들의 역할이다. 이들은 단순히 시위 군중에 가담하여 소위 ‘쪽수를 불리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만세시위에서 기생들은 시위 군중들의 참여와 연대를 독려하고 촉발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안성의 사례를 보자. 3월 11일의 소규모 시위 이후 30일부터 본격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한밤중까지 경찰서에 투석하고 면사무소와 군청을 공격하는 등 매우 격렬한 시위였다. 전국적으로 보아도 가장 격렬한 시위로 손꼽힌다. 군중들의 과격한 시위에 놀란 경찰은 총을 발포하고 주동자를 체포하며 군중을 해산시키자 했다. 이러한 위협적 상황에서 군중은 주춤했고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가 싶었지만, 다음 날인 31일 오후 안성조합 기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하자 다시 각처에서 군중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군청에 다다른 기생들은 군수를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경찰서와 면사무소에 들어가서 만세를 부르는 등 군중과 합세하여 안성 부내 곳곳을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에 대한 일제의 무력 진압에 잠시 생겨난 소강상태를 뚫고 기생들이 선두에 섬으로써 군중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어 만세시위를 이어 나갔던 것이다.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사상기생들

3·1운동 직후 기생들은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치안 책임자 지바 료(千葉了)는 기생들이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고 회고했다. 기생들이 조선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사상을 불러일으켜 화류계에 출입하는 조선 청년치고 불온한 사상을 가지지 않은 자 없게 되었고, 간혹 일본인들이 기생집에 놀러 가도 그 태도가 냉랭하기가 얼음 같았다는 것이다. 기생들의 불온한 행동에 대한 경찰들의 경계는 실제로 심각했던 것 같다. 1919년 11월 종로경찰서는 기생들이 술자리에서 불온한 사상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기생들을 소환하여 불온한 행동을 하면 처벌할 뿐만 아니라 생업도 금지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기생들은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적극적인 역할까지 담당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 기생들

기생들의 이러한 활동이 빛을 본 것일까. 앞서 언급한 이서구는 만세시위 이후 달라진 사회세태 중 특이한 것으로 기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손꼽았다. 전에는 기생이라면 그야말로 ‘노류장화(路柳墻花)’로만 여겨 자못 천하게 취급해왔지만, 3·1운동이 일어나면서부터 기생들의 주가가 뛰어올라 “기생에게 돈 쓰는 청년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회고한다. 만세시위에의 참여 경험은 기생들을 보는 사회적 인식도 바꿨지만, 기생들 자신의 가슴과 뇌리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보이는 자신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기생들의 집단적인 투쟁 속에서 이러한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포주에 대한 기생의 반발은 1910년대에도 존재했지만, 개별적인 행동을 넘어서 1920년대 기생들은 집단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김향화를 이어 현계옥, 정칠성 등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기생들이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기획연재 - 역사공장의 독립운동가 열전] 소현숙 (일본군 ‘위안부’문제 연구소 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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