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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복궁 가린 총독부청사, 해방 후 반세기 어떻게 생명을 이어갔나[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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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23 09:00:00 수정 : 2019-03-09 15: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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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지워야할 치욕인가 기억해야 할 역사인가

불과 20여 년 전까지 서울 한복판에 조선총독부청사가 서 있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반세기 가까이 지났으나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습니다. 국가 행정의 중심인 정부중앙청사로, 가장 빛나는 문화재를 모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재활용되기까지 했습니다. 

 

 

거대한 덩치로 경복궁을 완전히 가린 조선총독부청사.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뜨겁고, 숭고했던 그 때를 떠올리면 일제 식민지 정책의 온상인 건물이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건물의 철거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는 사실에 이르면 희한하다 싶기도 할 겁니다.

 

철저하지 못했던 일제 잔재 청산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그렇게 생각하기 쉬우나 총독부청사 철거 논란은 판단이 쉽지 않은 쟁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실 이 건물이 해방 후 중앙청으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된 시간이 길었다는 점에서 ‘총독부청사’라고만 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그러나 철거의 이유가 그것의 태생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총독부청사라고 표기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철거는 야만”(?)…총독부청사의 질긴 생명력

 

‘숭례문 세우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인 최종덕은 현직 공무원으로 2008년 화재로 주저앉은 숭례문 복구 작업을 이끈 경험을 책에 담았습니다. 공무원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책의 내용은 솔직합니다. 그래서 재밌고 기록물로서의 가치도 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에 흥미로운 일화 하나가 전합니다.

 

화재로 훼손된 숭례문 현판의 복원 작업을 진행하던 중 현판 글씨가 원형과 다르다는 점이 확인됐습니다. 복원팀은 원형을 추적해 글씨를 바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건무 당시 문화재청장은 잘못된 조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변형된 현판에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시간과 역사가 담겨 있는데, 함부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총독부청사 철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책에 따르면 이건무는 “이미 없어진 경복궁을 새로 짓기 위해 역사의 실체인총독부청사를 철거한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며 “총독부청사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사의 산 증인이다. 중앙청으로 사용했고,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으로도 사용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최종덕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총독부청사를 그 자리에 두고는 경복궁을 복원할 수 없었다”며 “시민들이 경복궁을 보는 것과 총독부 청사를 보는 것 중 무엇이 나은지 생각해볼 문제다. 국민감정도 중요하다. 몇 사람의 신념이나 취향 때문에 대중의 감정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맞섰습니다.

 

단순히 특정 건물의 존폐 문제를 넘어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된 것이라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프고, 치욕적인 역사의 의미, 그런 역사를 증언하는 대상의 가치 등과 관련된 것입니다.

 

총독부청사가 완공된 것은 1926년입니다. 대지 면적 9만7457㎡(2만9481평), 건평 6991㎡(2115평)의 르네상스 양식인 이 건물은 막대한 덩치로 경복궁을 막아섰고, 강점기 내내 일제의 한반도 지배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다른 용도로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청사로 사용되었고, 제헌국회가 여기서 개원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는 중앙청으로 쓰이며 대통령 집무실, 국무총리실, 각 부 장관실이 들어섰습니다. 1983년 8월 15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패를 바꿔달았습니다. 

 

 

 

◆“민족정기 바로세워야” vs “치욕적 역사도 기억해야”

 

총독부청사의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철거를 강력하게 원했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습니다. 하지만 철거 비용, 대체 건물 마련 등의 문제가 걸렸고 보존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무산됐습니다. 

 

 

조선총독부청사 철거 모습.

결단을 내린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1993년 8월 9일, 그는 “조상의 빛나는 유산이자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를 조선총독부 건물에 보존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나오기까지 상당한 진통이 이어졌습니다.

 

철거를 주장하는 측은 총독부청사를 보며 울분을 토했고, 철거 반대 측에 친일의 혐의까지 두었습니다. 이들에게 총독부청사 철거는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것이었습니다. 1990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 이런 생각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식민통치의 본산인 총독부청사를 아무 거리낌없이 관청으로 사용하고 있다. 마치 민족의 유산을 소중히 보존하듯 함은 언어도단이다.…친일이 왜 나쁜 것인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일부 관료의 오만성 같은 사고방식에서 출발한 일…”

 

보존을 주장하는 쪽은 일제강점의 치욕 역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인 만큼 그것과 관련된 총독부청사 역시 보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총독부청사는 ‘네거티브 문화재’가 됩니다.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경각심을 키우고, 일제의 침략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문화재가 꽤 있습니다. ‘구 서울역사’(사적 284호)가 대표적이죠. 전국 철도망의 중심 역할을 오랫동안 했고, 지금은 문화행사장으로 활용돼 식민지의 의 흔적을 떠올리기가 어렵지만 일제가 전쟁 물자를 공급하고, 수탈정책의 근간이 된 기차의 집합지가 이 곳이었습니다.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축적된 역사의 현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강했습니다. “이 건물과 관련되어 연상되는 과거는 비통하고 고통스럽지만 다른 종류의, 살아 있는 기억도 중요하다”는 평가가 그것입니다.

 

건물 자체의 가치에 주목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총독부청사는 규모, 디테일 면에서 아시아의 보기 드문 초기 근대 건축물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일본 건축계는 “아시아의 근대 건축 중 가장 훌륭한 건물이다. 왕궁 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을 함께 하는 형태를 취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서를 한국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분분했지만 여론은 철거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1992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서울 시민의 71.3%가 ‘철거 혹은 이전’에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수치’(71.8%)라는 이유가 가장 많았습니다. 1993년 6월 조사에서는 철거 찬성이 51.4%, 반대가 31%였습니다. 철거 결정은 이런 여론에 기대어 나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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