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보았던 ‘그린 북’은 후자에 속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름을 날린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인종에 대한 문화적 편견과 화해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를 풀어내는 열쇠로 음악을 사용하고 있었다. 평소 음악의 음향적 생김새 못지않게 악곡과 청자 간 교감의 조건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는 영화의 완성도 외에도 음악 열쇠가 작동하는 영화적 장치가 자못 흥미로웠다.
주성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음악학 |
음악영화라고 하면 으레 그렇듯, 발레롱가가 셜리에게 호기심을 갖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그의 연주를 처음 듣고서였다. 발레롱가는 음악에 빠져들고 셜리에게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다.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음악의 감동이 있을 때면 우리는 흔히 ‘음악은 만국공통어’라는 말을 떠올리지만, 낯선 것의 이해는 그것의 속성보다도 그를 바라보는 시선의 사전 경험과 태도가 좌우한다는 사실, 유독 음악을 논할 때면 우리가 곧잘 잊는 그 사실을 영화 속 발레롱가의 표정과 몸짓은 곱씹게 한다. 음악에 감동하는 이유는 작품보다 그에 관여된 사람, 청자와 음악가의 사정에 있을 때가 많다. 험하게 살아온 무지렁이였지만 발레롱가에게는 음악에 열려 있는 마음의 문이 있었고, 그리로 들어선 셜리의 연주는 마침내 흑인에게 닫혀 있던 다른 문조차도 열 수 있었다.
이미 성공한 음악가로 인정받는 셜리가 개런티도 적고 위험한 남부 연주여행을 강행한 것에 의아해하는 발레롱가에게 셜리의 동료는 “천재성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어. 용기가 필요한 일이 있거든”이라고 말한다. 셜리는 남부 백인들에게 ‘소리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흑인이 연주하는 음악’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연주에 담긴 셜리의 절규를 그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발레롱가처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지만,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능력이 없었다. 셜리의 심정을 이해하려 했다면 그들은 그 연주에서 더 큰 감동을 얻었을 텐데 말이다. 대신에 그들에게 다가서려 용기를 냈던 셜리는 그 힘든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발레롱가와의 진정한 우정과 사람에 대한 온기를 얻는다. 훈련받은 것은 클래식인데 재즈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을 괴로워하는 셜리에게 “당신이 해병특공대요?”라며 훈련받은 걸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발레롱가의 격려도 음악가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듣기 좋은 음악이나 클라이맥스를 연출하는 음향적 감동을 기대하며 찾았던 극장에서, 인종적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발레롱가와 셜리를 통해 나는 음악적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음악과 삶은 다르지 않고, 진정한 음악이해는 사람의 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영화의 의도와 달리 내게는 기다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주성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음악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