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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복궁 '南門' 광화문이 동쪽 선 까닭은…콘크리트 복원[강구열의 문화재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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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16 09:00:00 수정 : 2019-03-09 14: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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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일제에 뜯기고 독재에 졸속 복원된 광화문

“오오 광화문이여…여기에 조선이 있노라 자랑하듯이 으리으리한 여러 건축들이 전면 좌우에 이어지고, 광대한 수도의 대로를 직선으로 하여 한성을 지키는 숭례문과 멀리 호응하고, 북은 백악으로 둘리고 남은 남산에 맞서 황문(皇門)은 그 위엄 있는 위치를 태연히 차지하였다.”

 

1922년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표한 ‘사라지려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광화문을 소재로 한 글 중에 가장 유명한 것으로 꼽히지 않을까 싶습니다.

 

1968년 즈음 한 신문에 시인 서정주의 광화문에 대한 평가가 실렸습니다.

 

“그건 웃음거리가 아닌가? 그 웃음거리를 막대한 예산으로 급히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불쾌한 얘기다.”

 

시간이 꽤 흐르긴 했지만 광화문은 ‘위엄있는 황제국의 문’에서 ‘웃음거리’로 급전직하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광화문은 사연이 깊은 건물입니다. 아프거나 슬프고, 해괴하기까지 한 역사입니다. 야나기의 글이 발표된 즈음인 1920년대에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 산업화의 상징이 된 대한제국의 황문(皇門)

 

경복궁 남쪽의 전각을 밀어낸 자리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를 끝낸 일제는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새로 지으려 합니다. 1916년 6월이었습니다. 경복궁을 압도하는 크고 웅장한 건물을 세워 통치의 주체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조선총독부 공사 장면.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청사 건립이 진행되는 동안 광화문의 존치 여부가 관심을 모았습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그대로 둘 경우 총독부 청사를 가리게 되는지라 일제가 그대로 둘 리는 만무했습니다. 헐어 없앤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이때 야나기의 글이 발표돼 큰 반향을 얻었고, 철거 반대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철거하자니 반발이 심하고, 그 자리에 두자니 마뜩찮았던 일제는 광화문을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의 북쪽으로 옮겨버립니다. 1926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40년 넘게 경복궁의 정문-즉, 남문-인 광화문은 동쪽 담장에 서 있었습니다. 제자리를 벗어나 본래의 용도를 잃어버린 채 옛 이름만 간직하고 긴 시간을 보낸 겁니다. 6·25전쟁 때 문루가 파괴돼, 석축만 남아 형체마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6·25전쟁 때 문루가 파괴된 광화문.

광화문의 복원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입니다. 정부는 이때가 되어서야 경복궁의 역사, 가치에 주목해 1962~65년 5640만원의 예산으로 경회루 등 4곳을 보수하는 작업을 합니다.

 

구체적 복원계획이 나온 것은 1967년 박정희의 지시가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때의 복구 계획에서 광화문은 종합박물관-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의 출입문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자리는 그대로 두고 사라진 문루를 복원하려 했던 겁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따라 중앙청-총독부 청사가 당시 정부 중앙청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정문 자리로 옮기는 것으로 바뀝니다.

 

경복궁의 정문 역할을 회복할 여지가 생긴 것이니 반가운 일이나 ‘콘크리트로 복원하라’는 희한한 지시가 같이 내려옵니다. 광화문 보존의 ‘백년지대계’라는 명분을 앞세웠는데 콘크리트는 나무보다 단단하고, 부패할 일이 없으며 여하한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최고권력자의 관심에 따라 복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1968년 12월 11일, 9개월간의 공사 끝에 복원된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정희는 “콘크리트로 이렇게 거창한 우리 건축을 재현시킨 것은 건축계의 혁명이다. 천년을 지탱할 것”이라고 큰 기대를 표시했습니다. 

 

 

콘크리트 광화문 현판식.

◆"광화문을 본뜬 불쾌한 기념물"

 

남의 손에 뜯겨나가 엉뚱한 자리에서 보낸 세월이 수십 년이었습니다. 전쟁통에 파괴되어 흉물처럼 방치된 시간도 길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형태라도 얼추 갖추었으니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의 환희는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독재자의 서슬 퍼런 위세도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콘크리트라는 복원 재료가 무엇보다 문제였습니다. 서정주는 “불쾌하다”고 꼬집었고, 복원추진위원이기도 했던 건축가는 “결국 문화재 복원은 아닌 셈이고 그저 광화문을 본뜬 하나의 콘크리트 모뉴먼트(기념물)로 봐져야 할 것”이라고 일갈했습니다.

 

또 목조 건물이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면서 나무 재질 특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상실했습니다. 재료의 속성과 질감을 처리하는 손길은 건축뿐만이 아니라 모든 미술품의 예술적 특징을 가늠하는 것입니다. 특히 나무로 만든 건축이나 가구는 나무의 성질, 연륜이 미감에 크게 작용하기 마련입니다. 역사성과 예술적 특징이 사라진 콘크리트 광화문에 혹독한 비난이 쏟아진 건 당연했습니다.

 

박정희는 왜 콘크리트 복원을 고집했을까요. 콘크리트를 산업화의 한 상징으로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는 분석이 있습니다. “조국 근대화로 민족중흥을 실현하자”는 정권의 슬로건을 대변하는 하나의 기념물이었다는 해석인 것입니다.

 

‘콘크리트 복원 문화재 1호’인 광화문의 사례는 ‘사적지 정화사업’ 등을 통해 확대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사라진 경복궁의 서문 영추문이 1975년 콘크리트로 복원돼 지금도 경복궁의 유일한 콘크리트 건물로 남아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기는 했으나 불국사 복원에도 박정희는 콘크리트 사용을 지시했습니다.

 

1000년은 갈 것이라던 바람이 헛된 것이라는 건 그리 오래지 않아 판명이 났습니다. 1977년문화재관리국은 “앞으로 문화재의 보수 정화에는 콘크리트는 가능한 한 덜 쓰고 나무, 흙 등 옛날 그대로의 보수재료를 쓰는데 충실하겠다”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해체를 위해 기와를 걷어낸 콘크리트 광화문의 속살.

2000년대에 들어서는 해체 논의가 들끓습니다. 2006년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가 시작됐고, 2010년 8월 15일, 광화문은 고종대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습니다. 1926년 해체 이전되고 8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야 제 모습을 찾은 겁니다. 

 

 

콘크리트 광화문
현재의 광화문

광화문 인근의 서울역사박물관에 가면 콘크리트 광화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박물관 앞마당에 전통시대 건물의 구조와 각 부문의 명칭을 설명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그것입니다. 헐어내고 남은 부재의 일부를 가져다가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한 때나마 서울의 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있던 콘크리트 광화문, 끝이 초라합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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