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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재판 뉴스 단골손님 '포시진치'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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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11 16:05:06 수정 : 2019-02-15 17: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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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신들러' 후세 다쓰지 변호사, 일제강점기엔 '포시진치'로 통해 / 당시 독립운동가 변론 도맡았던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과도 친분 ‘포시진치씨 연합 대환영회.’

일제강점기인 1927년 10월11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당시만 해도 언론에서 일본인 이름을 표기할 때 요즘처럼 일본식 발음을 먼저 쓰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거나 하지 않았다. ‘풍신수길’ ‘덕천가강’ ‘이등박문’ 하는 식으로 우리 한자 발음 그대로 썼다. 포시진치(布施辰治)는 일본어 발음으로 ‘후세 다쓰지’라고 읽는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변호사
◆독립운동가 재판 기사에 빠지지 않았던 '포시진치'

11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 일제강점기 기사를 검색할 수 있는 시스템에 따르면 ‘포시진치’라는 검색어로 수많은 기사를 볼 수 있다. 위에 소개한 환영회 기사는 조선공산당 사건 변론을 위해 한국을 찾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위해 국내 시민사회단체의 유력 인사들이 모여 유명 음식점에서 환영회를 열어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아일보도 창간 이듬해인 1921년부터 1933년까지 총 77건의 후세 변호사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대부분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가 일본 검찰에 의해 기소된 조선인 시국사범들의 재판 관련 기사들이다.

1927년 10월13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사진. 독립운동가 변론을 위해 조선에 온 일본인 후세 다쓰지(포시진치·布施辰治) 변호사 환영회 소식을 전하고 있다. ‘흥분의 포시씨 환영회장’이란 사진 설명에서 후세 변호사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1880년생인 후세 변호사는 일본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를 거쳐 메이지(明治)법률학교에 다니던 중 알게 된 조선인 유학생들로부터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후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실태 등을 듣고 조선인 인권문제에 눈을 뜬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100주년을 맞는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발표했다가 일본 검찰에 붙들려 조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그는 “평생토록 일본인임을 부끄러워 하는 자세로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921년부터 국내 신문 사회면에 ‘포시진치’란 이름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은 후세 변호사가 조선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등 시국사건 변호인으로 참여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훗날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의열단원 황옥 사건(1920년)과 광복 후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 박헌영 등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 사건(1925년) 등에서 조선인 변호사들과 연대했고, 바다 건너 조선을 찾아 직접 법정에 출석하기도 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와 교우… '일본 신들러'

광복 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 훗날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허헌 등 당시 몇 안 됐던 조선인 변호사들이 후세 변호사의 ‘카운터파트’였다. 실제 한인섭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이 2017년 펴낸 평전 ‘가인 김병로’도 일제강점기 후세 변호사의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왼쪽)과 나란히 서있는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국적을 초월해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깊이 교류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후세 변호사는 1923년 일본 간토(關東)대지진과 뒤를 이은 조선인 학살사건 때에는 “일본군 계엄사령부와 경찰이 조직적으로 ‘조선인이 습격해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일본 당국을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후세 변호사는 1933년과 1939년 두 차례 일본에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재판에 넘겨져 수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1933년 이후 국내 언론에서 ‘포시진치’가 사라진 것도 이 때문이다. 후세 변호사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8년 지난 1953년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957년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김병로는 1960년 4·19혁명 직후 정치개혁을 목표로 정계에 뛰어들어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당시 그가 만든 정당 ‘자유법조단’은 20세기 전반부에 후세 변호사 등 일본의 진보성향 법조인들이 뭉친 단체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 대법원은 1990년대 들어 ‘법원100년사편찬위원회’를 꾸려 옛 사료를 모을 당시 비로소 후세 변호사 관련 자료의 고증과 연구에 나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한국 방송에 처음 소개된 뒤 후세 변호사는 ‘일본인 신들러’란 호칭을 얻었다.

2004년 당시 노무현정부는 고인이 된 후세 변호사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은 후세 변호사, 곧 ‘포시진치’가 처음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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