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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세자 교육관 '자선당'… 일제에 의해 뜯겨진 조선의 자존심[강구열의 문화재 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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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2-01 09:00:00 수정 : 2019-03-11 14:5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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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경복궁 상처의 시작 '자선당' 이야기

 지난 21일 발표된 서울시의 ‘새로운 광화문광장 프로젝트’는 ‘시민광장’과 ‘역사광장’을 축으로 합니다. 역사광장 조성으로 광화문 앞의 월대가 복원되고, 해치상은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의정부 건물도 다시 세울 계획입니다. 궁궐 담장과 분리돼 도로 한복판에 고립된 동십자각, 표지석만 전하는 서십자각의 제모습 찾기도 고려하고 있답니다. 발표 이후 이런저런 논란이 뜨겁지만 경복궁이 제모습을 찾아가는 한 과정이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계획대로 될 지는 두고봐야겠으나 사연많은 세월을 지내며 훼손돼 1990년대 이후 본격적인 복원이 진행 중인 경복궁의 역사에 한 장면이 될 듯은 합니다. 

 

 

경복궁 전경.

경복궁의 역사는 1395년 조선의 첫 궁궐로 완성되면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 때 불에 타 200년을 훌쩍 넘게 폐허로 전해졌습니다. 다시 세워진 것은 1860년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즐기는 경복궁의 뿌리입니다.

 

경복궁은 ‘찬란한 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과 우리의 가난·무지에서 비롯된 상처가 깊습니다.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반된 이 두가지 사실을 함께 놓고 봐야 지금의 조선 궁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000만 관람객 조선 궁궐, ‘최고의 문화유산’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중건 공사가 시작됩니다. 공사를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으로 무너진 왕권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대역사(大力事)였습니다. 760여 만 냥을 들였고, 4개월간 하루 평균 공장(工匠) 1614명, 군인 1900여명이 동원됐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단순 비교는 무리지만 정조(재위 1776∼1800)가 수원 화성을 조성하면서 87만3000여 냥, 공장 1840여명을 투입했다고 하니 경복궁 중건에 들인 공력의 크기를 짐작할 만합니다. 경복궁 중건으로 나라가 휘청였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도 싶습니다. 임금의 거처이자 집무공간이었으며, 조선을 이끈 권력의 산실이었던 궁궐의 조성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역량이 결집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들어간 재원, 인력만으로 당대의 공력을 가늠할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정궁(正宮)이자 법궁(法宮)인 경복궁은 지금도 최고의 유산으로 꼽히며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궁중문화축전 중 궁궐 야행을 즐기는 관람객들.

매년 5월에 열리는 ‘궁중문화축전’을 예로 들어볼까요. 경복궁을 비롯한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의 ‘4대 궁궐’과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서 열리는 축제입니다. 이 때에 기회를 잘 잡으면 임금이 되어 궁궐을 거닐고, 전각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궁궐에서의 식사도 가능합니다. 야간 개장은 궁궐 감상의 색다른 기회입니다. 호응이 컸습니다. 2015년 1회 때 23만 여명이, 지난해에는 49만 여명이 다녀갔답니다. 흥행의 요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궁궐이란 하드웨어 자체의 탁월함이 결정적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공연, 체험, 숙박 등 프로그램이 무엇이든 궁궐이라 더욱 특별하게 여겨지는 듯 합니다.

 

2016년 4대 궁궐과 종묘를 찾은 관람객(외국인 포함)이 1000만 명을 넘었습니다. 경복궁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궁궐은 가장 사랑받는 문화재입니다.

 

◆‘자선당을 아십니까’…궁궐의 깊은 상처 

 

 

자선당 유구.

설연휴입니다. 경복궁에 가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자선당’을 한번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자선당은 경복궁의 ‘동궁 영역’에 있습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전각입니다. ‘미래의 지존’이 거처했던 곳인 만큼 건물의 위상이 당당했습니다. 

 

 

 

자선당.

또 하나의 자선당이 있습니다. 경복궁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아 찾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명칭은 ‘자선당 유구’입니다.

 

직접 가서 보면 이게 뭔가 싶어질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기단 뿐이라 궁궐 건물이라 하기에 초라합니다.

 

자선당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뜯겨져 일본인에게 팔렸습니다. 당시 일제는 조선 통치 5주년을 기념한다며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박람회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경복궁이 개최 장소로 정해졌고, 공진회 시설이 들어설 공간의 확보를 위해 경복궁의 여러 건물을 헐어버립니다. 자선당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오쿠라 기하치로라는 사업가에게 팔린 자선당의 운명은 참혹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재조립돼 ‘조선관’이란 이름을 붙인 오쿠라의 사설 미술관 건물이 됩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렸고, 그 때부터 유구만 남아 전해졌습니다.

 

한국인 학자가 발견하고, 환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여 자선당은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길고, 험했던 여정의 끝에 자리잡은 곳이 건청궁 옆입니다.

 

자선당은 1999년 복원되어 번듯하고, 자선당 유구는 본래의 것이나 안쓰럽습니다. 자선당을 복원하지 않고, 환수된 자선당 유구을 원래 자리인 그 곳에 설치했다면 어떨까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관람객들과 만날 수 있겠으나 궁궐과 어울리지 않는 초라함, 그것에 얽힌 아픔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이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역사입니다.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와 더불어 아프고, 슬픈 역사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경복궁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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