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텼지만, 최근 참을 수 없는 일을 겪었다. 이 시기 직장인들의 숙제이자 ‘난제’인 연말정산 때문이다. 행정직이라는 이유로 내가 보좌하는 의원의 연말정산을 얼결에 떠맡았다. “업무가 바쁘고 잘 할 줄 모른다”며 본인의 공인인증서가 담긴 USB를 건네는 데 거절할 수가 없다. 더 황당한 건 종종 “일이 많아 힘들지?”라며 위로해주던 일부 보좌관들도 개의치 않고 연말정산 서류를 내민 일이다. 극심한 배신감과 함께 윗사람들의 개인 용무를 처리하는 게 공무원의 본분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오늘 밤은, 씁쓸함을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하련다.
위 사례는 최근 페이스북 페이지 ‘여의도 옆 대나무숲’의 익명 투고란에 올라온 사연을 국회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 재구성 한 것이다. 세계일보가 28일 복수의 여야 의원실에 확인한 결과 연말정산 기간 여의도발 ‘내리 갑질’이 실제로 비일비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회사무처는 대기 시간이 너무 길다는 의견을 수렴해 지난해부터 ‘번호표’ 제도까지 도입했다. 하지만 연말정산 서류를 직접 제출한 국회의원은커녕 보좌관도 보기 힘들었다는 게 당시 접수 업무를 맡았던 관계자의 전언이다. 한 초선의원실의 보좌관은 “국회의원의 경우 소득세 신고부터 추가 서류 출력·제출까지 아랫사람이 한다고 보면 된다. 거의 100%다. 일부 보좌진도 비슷한 행태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털어놨다.
급수가 낮은 의원실 비서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있지만, 일각에선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국민 정서를 고려하면 국회의원이 특권을 행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의원실 사람들이 빡빡한 일정으로 시간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양해를 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안병수 기자 r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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