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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백의 포근함’ 내려앉은 풍경… 길한 기운을 뿜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19-01-26 15:55:43 수정 : 2019-01-25 16: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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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瑞雪이 내리는 그림 / 제주 자연을 주제로 그리는 강요배 / 화폭에 인간의 감정 서린 풍광 녹여 / 폭설 다음날 창밖 보니 편안함 느껴 / ‘수직·수평면 풍경’ 작품으로 탄생돼 / 회화 속 ‘눈’ 등장은 오래되지 않아 / 낭만보다는 대부분 시련·고독을 상징 '깨긋하고 순수함' 표현 드물어 / 프리드리히, 절망 속 희망 담아
제주의 자연 풍광을 주로 그리는 강요배가 지난 겨울 작업실 마당을 그린 ‘수직·수평면 풍경.’
학고재
# 새해에 복되고 길한 일을 불러오는 행위

새해에 내리는 눈을 서설(瑞雪)이라고 한다. 상서로울 서(瑞)자를 써 복되고 길한 일이 생기는 눈이라는 뜻을 가졌다. 고단했던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했으니 복이 가득하기만을 기원하는 옛 어른들의 마음을 담은 말일 것이다. 중요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리는 눈 역시도 그렇게 부르지만 대체로 새해에 처음 내리는 눈을 의미한다.

서설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생 때였다. 할머니가 창밖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서설이 왔으니 올해는 풍년이 들겠네”라고 나지막이 혼잣말을 하셨다. 말을 하는 안면에서는 흐뭇함과 고마움을 담은 옅지만 희망찬 미소가 보였다.

나는 한평생 농사를 지으신 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꽤 신빙성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새해가 되면 눈이 담긴 그림을 괜히 잔뜩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이제는 꽤 오래된 습관인데 복되고 길한 일들이 내 주위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게 욕심 아닌 욕심을 채우고 있노라면 뜻밖의 서정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서설의 느낌을 온전히 담은 시가 있다. 윤동주가 용정에서 학창시절에 쓴 것으로 알려진 <눈>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소년이 네 절에 짧게 담은 눈의 외면은 차가우면서도 내면에서 푸근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곧 넉넉한 풍요로 연결된다.

이 시에 담긴 눈에서 서설의 기운을 느끼고 나면 할머니 얼굴에서 비쳤던 옅은 미소의 의미가 보인다. 가난하고 고된 삶 속, 서설은 풍년을 의미했고 풍년은 가족들의 안위와 연결되는 것일 터이니 그리 웃으셨으리라.

# 눈은 그림 속에서 시련을 불러일으키는 냉혹한 존재

서설을 대신해 새해 처음 만날 눈 그림을 보기 전에 일반적으로 회화에 나타나는 눈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실 눈이 회화에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선사시대를 그 기점으로 삼는 길고 긴 미술사를 놓고 봤을 때 그렇다. 회화는 미술사의 대부분 시간 동안 인물과 사건을 기록하거나 종교와 왕족을 신성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풍경을 감상의 목적으로 그리는 것은 서양에서 15세기, 우리나라에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등장했고 눈은 당연히 그다음에 회화에 나타났다.

눈은 이렇게 그림 속에 나타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긴 기다림 끝에 눈이 얻은 역할은 시련과 고독, 공포와 불안을 동반하는 존재였다. 추위가 가지고 오는 겨울이라는 계절의 잔혹함을 시각화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소재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눈은 황량한 배경을 바탕으로 바람에 흩날리며 화면을 어지럽히기 일쑤였으며 등장하는 형상을 모두 얼려버리고는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로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서양에서 ‘눈’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1774∼1840)의 ‘겨울 풍경’을 살펴보자. 프리드리히는 그림에 주관적인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낭만주의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다. 자연을 인간 감정의 거울로 사용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작품세계를 구축해 인정받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 내면의 솔직한 모습을 눈, 바람, 안개 등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독일 낭만주의 거장인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의 대표작인 ‘겨울 풍경.’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의 주요 소장 작품이다.
런던 내셔널갤러리

이 작품의 화면 앞쪽에는 눈 속에 쟁기가 파묻혀 있다. 중간의 나무에는 예수의 십자가상이 걸려 있다. 이 모든 것 위로는 눈보라를 일으키는 세찬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화면 앞쪽에 머물렀던 이들이 황급히 쟁기를 버리고 길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쟁기는 곡식을, 눈은 고난을, 그리고 십자가는 절실한 소망과 절박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결국 저 멀리에 보이는 교회, 즉 안식처에 다다랐을 것이기에 우리는 안도할 수 있으며 절망 속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한국화에서 ‘눈’을 담은 대표작으로는 이인상(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가 있다. 이인상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담백하고 격조 있는 서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성품은 그대로 작품에서 소나무와 바위라는 문인적 소재, 깔끔하면서도 투명한 색감의 먹으로 만들어내는 단엄한 분위기로 드러난다. 쉽사리 남을 칭찬하지 않던 김정희마저도 그를 칭송하며 그의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교의 빼어남이 아닌 고결한 기운이라고 했다.

이 작품에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등장한다. 화면의 전면에 굵은 소나무 하나가 곧게 뻗어 있고 그 허리춤 뒤로 휘어 있는 소나무가 버티고 있다. 두 그루 모두 바위틈 사이에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서릿발 품은 무거운 백설을 힘들게 이고 있지만, 그 기상은 골기가 강한 필세로 꿋꿋이 드러난다. 그림 속 상황들은 이인상이 지향했던 삶과 정신을 담고 있다. 고난 속에서도 힘을 내라고, 버티라고, 그리고 나아가라는 세상을 향해 외치는 작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다.

눈은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 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낭만적이고 성스러운 대상이라기보다 시련과 무게를 상징하는 냉혹한 회색빛 존재로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 서설의 포근한 풍요로움을 그림 속에서 만나기

1월1일이면 의례 책장 앞에 서서 눈이 내리는 그림이 나와 있는 도록을 뒤적이는데 황량한 풍경을 다룬 그림이 대부분이니 조금은 속상한 노릇이었다. 가끔 눈썰매를 타는 장면같이 귀엽고 예쁜 그림을 만나는 듯하기도 했지만, 눈이 온 날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회색이나 푸른색의 기운은 괜히 쓸쓸한 기분을 동반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꽤 보내고 나서 내가 가진 서설의 느낌을 그대로 담은 그림을 찾은 건 지난봄 강요배(1952~ )의 제주도 작업실 귀덕화사(歸德畵舍)를 방문한 날이었다. 찾고 있던 그림을 만난 기쁜 마음 때문인지 여러 번 방문했던 곳임에도 그날은 유독 생생하게 기억난다. 마당에 피어 있던 수선화의 모양새까지도 눈에 선하다.

강요배는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인간의 감정 서린 풍광을 그리는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최근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문화체육관광부가 2018년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로 선정해 옥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고미술 전문가들이 눈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 중 하나인 이인상(1710∼1760)의 ‘설송도.’ 사군자는 아니지만 문인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소나무의 기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작업실에 들어서자 그가 그간 작업한 수십 점의 작품이 너른 공간에 펼쳐져 있었다. 바람에 의해 변하는 하늘,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우레에 맞은 채 갈라지는 나무 등 자연 풍광을 그린 거대한 작품이 잔뜩 있었다. 그 사이에서 눈 내린 마당을 그린 작고 수수한 그림 한 점이 눈에 콕 하고 박혔다. 나의 어린 시절 할머니가 알려 주었던 서설의 느낌을 듣고, 윤동주가 글로 써 내려간 ‘눈’ 읽고 풀어 강요배가 붓으로 표현한 것만 같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수직·수평면 풍경’은 제주에 전에 없던 양의 눈이 쏟아져 내렸던 지난겨울, 작업실 마당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작업실이라고 하면 예술적이고 장대한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 그림 속 작업실은 일상적이면서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인상 깊다.

“선생님 이 그림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그림 앞에서 말을 건네자 작가는 구도에 대한 실험을 펼친 작품이라고 했다. 어느 날 밤새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 뒤 아침이 되어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쌓인 풍경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가만히 살펴보니 눈이 편편이 쌓여 만든 수평과 그 뒤로 서 있는 수도와 나무의 수직이 몬드리안의 회화처럼 구조적 안정감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장면이 흥미로워 구도에 대한 연구를 캔버스에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들었지만, 여전히 나에게 이 작품은 서설 그림으로 삼고 싶은 복되고 길한 느낌의 장면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눈은 어느 쪽 하나 더 뭉치지 않고 넉넉하게 고루고루 쌓여 평등하고 평화롭다. 수돗가에 내놓아져 있는 고무대야의 모습은 어릴 적 할머니 댁을 떠올리게 해 정겨운 느낌을 자아낸다. 한쪽에 심은 먼나무는 봄과 여름에 꽃을 피우고 가을과 겨울에 열매가 달리는 나무인데 열매가 빨갛게 익은 것이 복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럽다.

그림 앞에 가만히 서서 쌓인 눈과 그 사이로 펼쳐진 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작가의 따듯한 성정이 느껴졌다. 작은 생명과 소소한 일상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인간에 대한 존중까지 연결되어 있음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배려와 베풂을 가지고 오기에 항상 좋은 기운을 뿜는다.

# 서설을 바라보며 새 마음 먹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새해가 되어 눈 그림을 찾아보며 혼자만의 서설을 즐겼던 것은 실제로 나의 한 해 시작에 길한 기운을 꽤 불어넣어 준 것 같다.

‘차라리 이렇게 눈에 묻혀 버리니 서울도 비로소 아름답게 느껴진다’라는 문장을 얼마 전 읽었다. 눈이 내리고 나야 서울이라는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도, 굽이도는 한강도 그 본 모습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 속 하얀 눈을 볼 때마다 그것에 나를 비추어 보았다. 그제서야 주변의 복잡한 것들을 걷어내고 내 본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본 모습을 되새겨보는 것은 비로소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었다.

눈의 풍성함은 초심으로 돌아간 나에게 앞날에 대한 여유를 안겨주었다. 여유는 곧 삶의 목적의식과 자아를 고요하게 관찰하는 침착성을 남길 수 있게 하였다. 일상의 소란스러운 상황들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삶을 스스로가 고스란히 살아낼 수 있게 한 것이다.

새해가 시작하고 눈이 내리기도 전에 그림으로 서설을 맞이하는 나의 습관이 앞서 말했듯 욕심 많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 행위는 자신이 맡은 ‘복되고 길한 일을 불러오기’라는 역할을 ‘새 마음 먹게 만들기’를 통해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올해의 첫날 홀로 꺼내 보려던 서설의 기운을 가득 담은 강요배의 눈 그림을 나눈다. 시련이 아닌 포근함을, 쌓인 눈의 무게보다 내리는 눈의 자유로움을 느끼기를 바라며 책갈피 속 소중한 네 잎 클로버를 선물하는 마음으로 소개한다. 그림이 담고 있는 길하고 풍성한 기운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전해지기를.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학교 미술관·박물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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