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치는 듯한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한 사람이 다리 난간에서 소리치고 있는 그림, ‘절규’로 유명한 뭉크의 가족사와 전기를 읽다보면 그 화가의 그림이 왜 어둡고 우울하게 느껴지는지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몇 군데 도시에서 띄엄띄엄 그의 그림을 보기도 했지만 더 많은 그림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누구보다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고독에 주목한 화가의 그림을. ‘절규’를 포함한 그의 대표작이 이달 하순까지 도쿄도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는 소식은 올해 첫 희소식처럼 다가왔다.
조경란 소설가 |
그 전시를 시작으로 루벤스 전, 베르메르 전, 필립스 컬렉션 전까지, 올겨울 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전시를 모두 관람했다. 어떤 도시에 갔을 때의 즐거움 중 하나는 예기치 못했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데 있지만 이런 대형 전시를 한번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분주히 미술관을 찾아다니는 며칠 동안, 나는 지난해 삶을 반성하거나 새해 계획을 세우는 일은 잊어버렸고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니 나는 왜 그림을 보러 갈까, 그림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서.
언젠가 영국의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 캐네스 클라크의 ‘그림을 본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다가 그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일이며 그것은 적극적이며 자발적인 감정을 필요로 한다고 배운 적이 있었다. ‘보는’ 행위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사색이라는 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동안 나는 그림과 문학이 얼마나 닮아 있는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예술 분야들이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세계라는 점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본다는 일은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투영시키는 일일지 모른다. 내면을 돌아보거나 그 수단으로서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뭉크는 어느 글에서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숨을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 있는 존재를 그리려고 했다고. 수많은 관람객이 그의 그림 앞에서 그 숨 쉬고 아파하고 살아 있는 존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경험으로 어떤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말을 걸고 싶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 만큼. 그림이 주는 순수한 감동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잊을 수 없는 몇 점의 그림이 벌써 올해 생겼다. 특히 나는 뭉크의 ‘절규’ 옆에 걸려 있던 ‘절망’이라는 그림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다. 지난해 삶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새해는 시작됐고 이미 여러 날이 지나고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새해에는 ‘절망’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을지 모른다. 그래야 ‘희망’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이런 작정을 고독한 한 사람이 고개 숙인 채 다리에 서 있는 뭉크의 ‘절망’을 보고 하게 됐다. 얼핏 보았을 때와 달리 그 그림이 전반적으로 담고 있는 게 단지 절망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천히 알아차리는 순간.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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