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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불감증, 후진국형 사고 여전…韓 '안전선진국' 아직 멀었다 [김현주의 일상 톡톡]

입력 : 2018-12-25 05:00:00 수정 : 2018-12-24 20: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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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火魔)로 29명이 숨지고, 40명이 부상한 충북 제천의 화재 참사가 발생한 지 1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과 끔찍한 사고를 체험한 제천시민들은 지금도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제천참사는 재난 대응 시스템의 문제점, 불법 건축과 소방시설 불량 등 안전 취약 요인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불이 났을 당시 분초를 다투는 긴급 상황이었지만, 진입로의 불법 주·정차 차량 탓에 인명구조용 고가사다리차는 500m를 우회해야 했습니다. 비상구는 창고로 쓰여 대피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안전의식 부족으로 발생하는 사고는 그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제천 참사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올해 1월 말 경남 밀양에 있는 세종병원 응급실에서 불이 나 39명이 숨지고, 15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제천 때보다 더 큰 인명 피해를 낸 것입니다.

스프링클러가 설치되지 않은 데다, 방화문이 열려 있어 유독가스가 빠르게 번져나가 이동이 불편한 환자들은 그대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울 종로의 3층짜리 한 고시원에서 지난달 발생한 화재는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입니다. 스프링클러 등 방화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치는 인명 피해로 이어졌습니다.

강릉 펜션 참사는 모두가 즐거워야 할 연말, 국민들을 슬픔에 젖게 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치고 여행에 나섰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가스에 중독돼 3명이 숨지고 7명이 의식을 잃었습니다.

객실 보일러의 연소 가스 배기관 연결 부위가 어긋나 그 틈으로 유출된 일산화탄소가 사고의 유력한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이는 가스 누출경보기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 여전한 상황입니다. 대형 참사를 겪을 때마다 정부는 구호처럼 반복해서 '안전한 대한민국'을 외쳤습니다. 정말 우리나라는 안전한 국가일까요?

물론 국민들도 안전의식을 높아져야 합니다. 과거 제천이나 밀양 참사가 주는 교훈을 잊은 듯 소방도로의 불법 주·정차는 여전한 실정입니다. 다중이용시설의 소방·건축·전기·가스 시설은 상당수가 불량인데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안전이 헛구호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정부는 재난과 사고의 예방과 즉각적인 대응 시스템을 갖췄는지 모든 부문에서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형식적인 점검과 땜질식 처방으로는 반복되는 사고를 막을 수 없습니다.

고교생 10명의 사상자를 낸 이번 강릉 펜션 사고는 평소 간과해왔던 사회구조적인 허점들이 결합하면서 발생한 참사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무심코 지나쳐 온 각종 빈틈이 아이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는 것인데요.

이번에도 규정 허점, 현장 안전불감증 등이 어김없이 등장했고, 대학수학능력시험 후 학생들의 학습 공백에 대응하는 프로그램 미비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특히 이번 사고 원인으로 일산화탄소 누출이 최우선적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학생들이 쓰러진 채 발견된 지난 18일 현장에 출동한 구조대원이 간이 측정한 일산화탄소 농도는 155ppm이었습니다. 이는 정상 농도(20ppm) 대비 7배 이상 높은 수준입니다.

경찰은 지난 19일 브리핑에서 사망 학생 3명의 혈중 일산화탄소 농도가 각각 치사량(40%)을 훌쩍 넘은 48%·56%·63%으로 판독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방안이 일산화탄소로 가득 찼지만 펜션에는 경보기조차 없었습니다. 다른 숙박업소와 달리 농어촌민박의 경우 경보기 의무설치 대상 시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어촌정비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농어촌민박은 소화기와 단독경보형감지기를 설치할 경우 소방안전 기준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반면 같은 숙박시설인 호텔과 호스텔, 여관 등은 가스누출 경보기를 포함해 스프링클러, 누전경보기, 제연(除煙) 설비, 피난유도등과 같은 소화·경보·피난·소화용수·소화활동설비를 시설 면적에 따라 갖춰야 합니다.

이곳들은 공중위생관리법과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소방시설법) 적용을 받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이번 참변을 계기로 농어촌민박사업 시행지침을 다시 개정해 설치를 의무화할 계획입니다.

결국 숙박업소 중 농어촌민박이, 안전 규정 중 가스경보기 내용이 각각 법망에서 빗겨나가면서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 글쎄

운영자들이 가스경보기 설치 필요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안일한 인식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가스보일러(도시가스·LPG)로 인한 사고는 최근 5년간(2013~2017년) 총 23건이 발생했습니다. 사상자는 총 49명인데, 이중 화재 부상자 1명을 제외한 48명(98%·사망 14명·부상 34명)이 일산화탄소 중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스보일러 사고가 일산화탄소로 인해 발생하는데도 '경보기를 설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설령 한다고 해도 외면하는 게 현실입니다.

보일러 업계에 무자격 업체가 적지 않다는 점도 안전불감증 중 하나로 지목됩니다. 가스보일러는 누구나 대리점이나 온라인 등을 통해 구매할 수 있으나, 설치·시공은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라 가스시설시공업을 등록한 자(면허보유자)가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과 강릉시 등에 따르면 사고가 난 펜션의 가스보일러를 설치한 업체는 시에 가스시설시공업 등록을 한 업체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보일러 업계는 설치 무자격업체가 전국에 3만~4만여 곳 정도가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소비자들은 무자격자인지, 자격 갖춘 등록자인지 잘 모른다"면서 "등록된 업체보다 비용도 싸다. 대개 보일러 1대 설치하면 60만원 정도인데, 무자격자는 10만원 정도 싸게 받으니 소비자들은 이런 맛에 의뢰하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형식적인 점검, 땜질식 처방…반복되는 참사 막을 수 없어

수능 이후 학생들이 급격히 흐트러질 수밖에 없는 국내 교육 시스템도 이번 사고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무늬만 개인체험학습일 뿐 사실상 그냥 여행이었습니다.

인솔교사나 학부모 없이 진행하는 개인체험학습이 학생 안전사고에 취약하다는 우려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고3의 경우 대입 수시 합격자 발표 또는 수능 종료 후 대거 개인체험학습을 진행하는 사례가 많아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교육당국에 따르면 개인체험학습은 학생 개인계획에 따라 학교장 사전허가를 받고 개별적으로 관찰·조사·현장답사·직업체험 등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학칙이 정한 범위 내에서 학생이나 보호자가 신청하면 학교장의 사전허가를 받아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체험학습 실시 후 관련 보고서를 제출해야 출석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학생 개인의 흥미나 관심분야에 맞게 체험학습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이 개인체험학습의 장점인 것입니다. 체험학습 계획을 스스로 설계해 자기주도성도 높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안전사고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는 점입니다. 모든 체험학습 과정을 학생 재량에 맡기는 사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체험학습은 인솔교사가 동행하지 않는데다, 친가·외가 방문이나 친척 애·경사 참석 등 가족과 함께하는 행사 외에는 학부모가 함께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학생 관리도 여의치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대개 사후관리에 그치는 수준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보고한 체험학습 장소 대신 다른 곳을 찾는 경우도 많지만 추적관리가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안전사고에 가장 취약한 대상은 고3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이들이 대입 수시 또는 수능 종료 후인 11월부터 대거 개인체험학습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상당수 고교는 1~2학년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고3 개인체험학습기간을 따로 두고 있습니다.

특히 고3들은 이 기간 대입 중압감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또래끼리 모여 숙박을 포함한 여행을 떠나는 사례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강릉 펜션 사고 학생들의 개인체험학습도 비슷한 이유로 추정됩니다.

◆불의의 사고 시간·장소 가리지 않아…사고는 한 순간, 남겨진 고통은 길어

여행을 떠난 청년들이 숙박시설에서 불의의 사고로 생을 마감하는 사태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반복된 참사에 '국민안전을 먼저 챙기겠다'는 정부의 공언이 헛구호에 그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 강릉 펜션 사고뿐만 아니라 청춘들의 안타까운 희생은 이전부터 반복됐습니다.

2014년 2월17일 경북 경주의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이 무너져 10명이 숨지고 214명이 다쳤습니다. 당시 체육관에는 부산의 한 외국어대학교 학생 560여 명이 신입생 환영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무너진 체육관 구조물을 들어 올려 학생들을 구조했으나 갑작스러운 사고에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사고는 체육관 건물이 지붕에 쌓인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으면서 발생했습니다.

지붕 패널을 받치는 금속 구조물인 중도리 26개 가운데 14개를 제대로 결합하지 않았고 주 기둥 등에 저강도 부재를 사용한 것도 경찰 조사 등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사고 이후 건축물 적설 하중 기준이 강화되고 리조트 및 시공사 관계자들은 처벌을 받았으나, 뿌리 깊은 안전불감증은 사고 당사자들에게 잊히지 않을 깊은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같은해 11월15일에는 전남 담양군 한 펜션 바비큐장에서 불이 나 대학생 5명이 숨지고 12명이 다쳤습니다. 사상자 대부분은 나주의 한 대학교 패러글라이딩 동아리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화마를 미처 피하지 못해 변을 당했습니다.

불이 난 펜션은 나무와 샌드위치 패널·억새 등으로 지어져 삽시간에 잿더미가 됐는데요. 소방당국은 이들이 고기를 굽던 중, 불티가 지붕으로 튀어 화재가 급속히 확산하면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사고 원인을 분석했습니다.

반복된 사고로 숱한 인명이 희생되자 정부와 지자체, 숙박업소의 부실한 안전관리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안전관리에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이같은 희생은 되풀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고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탄절 아침을 맞아 다시 한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목을 기원합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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