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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 12월10∼16일] 냉전에 얼어붙은 난징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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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09 20:46:59 수정 : 2018-12-09 20:4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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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13일 난징(南京)을 점령한 일본군이 중국군 포로와 주민을 대량학살한 사건은 아직도 많은 물음표를 달고 있다.

우선 그 피살자 규모도 최고 35만명에서 ‘별로 없음’까지 갈린다. 전후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15만명으로 발표됐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이름도 여러 가지다. 중국 측은 ‘난징대도살(大屠殺)’로 부르고 서양에서는 ‘난징 대학살’이나 유태인 대학살에 비유해 ‘난징 홀로코스트’라고도 부른다. 일본은 ‘난징 사건’으로만 부르다 최근 들어서야 대학살을 인정하는 추세이지만 반론도 많다.

그러나 난징 대학살이 놀라운 것은 피해자 규모에 있지 않다. 사람을 얼마나 죽였는지보다도 어떻게 죽였는가가 더 눈길을 끌어서다.

일본군이 여성이라면 노소를 막론하고 선간후살(先姦後殺)의 방침에 따라 강간한 뒤 죽인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문제는 그보다 더 잔학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여성을 강간한 뒤 시아버지가 강간하도록 총부리를 겨누고, 그것이 끝나면 아들에게 어머니와 성교를 하도록 강요했다.

어린 아기를 보면 빼앗아서 하늘에 던진 뒤 떨어질 때 총검으로 찌르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 밖에 시신을 생선 말리듯 나무나 벽에 박아두기도 했다.

그 같은 만행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그 당시 중국인이 비참해 보여서만은 아니다. 그 악귀 같은 일본인이 따지고 보면 한반도에서 건너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통역 없이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피붙이여서다.

그 잔인한 유전자(DNA)가 우리 몸에는 없을까. 애석한 것은 그런 잔인성에 대한 고발이 그 뒤의 냉전상황에서 얼어붙고 만 점이다.

태평양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일본은 미국의 우방으로 점지돼 있었다. 반면 그 피해자인 중국은 자기네들끼리의 싸움에 정신없었다. 그 싸움이 끝났을 때 난징은 ‘죽의 장막’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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