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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딱히 내 잘못 아닌데 / 내가 감수해야 하는 경우 있어 / 매번 손해보는 선택 내리지만 / 그런 맑은 영혼 지닌 이들 많아 도서관으로부터 도서 대출 연체 알림 문자를 받았다. 반납예정일이 어제까지로 표시돼 있었다. ‘어, 대출기간이 어제까지였다고. 반납일 미리 알림 문자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내가 부주의해서 놓쳤나’ 하고는 도서관으로부터 받은 휴대전화 문자창을 살펴보니 도서관에서 꾸준히 보내오던 반납일 미리 알림 문자가 이번에는 와 있지 않았다. ‘뭐지, 도서관 문자발송에 문제가 있었나?’ 그동안은 도서관으로부터 반납예정일 이틀 전에 반납 안내 미리 알림 문자가 오면 신경 써서 출근길 가방에 대출한 책을 챙겨 넣고 퇴근길 잊지 않고 도서관에 들러 무인반납기에 반납하거나 그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면 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대출기간 연장신청을 하곤 했다. 연장한 대출기간마저 넘기도록 대출한 도서를 다 읽지 못하면 다시 연장신청을 할지언정 약속된 대출기간을 넘기지 않고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해 왔다.

그런데 반납예정일 미리 알림 문자도 받지 못했는데 느닷없이 도서 대출기간 연체자가 되고 만 것이다. 짚이는 데가 있었다. 얼마 전 첫눈이 오던 날 발생한 서울 아현동 KT 화재 사고로 인근 지역의 인터넷, 전화, 통신이 두절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고 하니 그 지역에 소재한 도서관 시스템에도 그 영향으로 반납일 미리 알림 문자 발송에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그러니 도서관을 찾아가 반납일 미리 알림 문자를 받지 못해 부득이 대출연체를 하게 됐다고 사정을 말하면 공공도서관 도서 대출 연체자라는 신용불량도 회복하고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의 대출기간도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며 점심시간을 쪼개 도서관을 찾았다.
안현미 시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서 대출 연체자라는 신용불량을 회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니더라도 피곤한 일이 차고 넘쳐서 친절할 여유가 없어 보이는 사서는 반납예정일 미리 알림 문자 발송은 도서관에서 도서관 이용자를 위한 ‘친절한’ 부가서비스의 하나일 뿐 그 문자를 받건 안 받건 도서 대출자는 반납일을 지켜 반납하는 게 당연하고 대출한 책을 다 못 읽은 건 당신 사정이니 대출연체자에게 적용되는 대출제한기간이 지나면 그때 다시 빌려 가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고 반납일을 지켜야 할 의무가 내게 없는 것도 아니니 유쾌하지는 않았으나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얼마 전 지방에 사는 한 선배가 서울의 책방 낭독회 초대 시인으로 초청을 받고 오후 5시12분에 출발하는 서울행 KTX를 타려다 겪은 낭패스러운 에피소드를 들으며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7시30분에 시작하는 낭독회 시간을 맞추려고 여유 있게 서둘렀는데도 1시간이나 기다려도 연착된 열차는 오지 않고 표를 반환해 가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더라는 것. 계획대로라면 이미 서울에 거의 도착해야 했을 시간에 표를 반환하려고 길게 늘어선 승객의 행렬에 끼어 표를 환불할 수도 없는 상황. 표 환불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서울까지 130km가 넘는 그 먼 곳에서 일단 택시를 잡아타고 올라왔는데 설상가상 서울에 진입하니 교통체증 때문에 서울 북부에 있는 책방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낭독회가 끝나도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도중에 지하철로 갈아타고서야 겨우 낭독회 끝나기 직전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초대 시인이 없는 낭독회는 어떻게 됐을까. 택시를 타고 오는 중인 시인이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다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며 성황리에 마쳤다고 한다.

살다 보면 딱히 내 잘못은 아닌데 내가 감수해야 하는 애매하고 모호한 일이 종종 생긴다. 그때마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놓고 감수해야 할지, 감수하지 말아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내 경우 대개는 내가 손해를 감수하는 쪽을 선택해 왔다. 왜 바보같이 매번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근사한 답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주변에는 나보다 더 바보 같은 사람이 많다. 이를테면 KTX 통행중지 때문에 못 왔다고 하면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는데도 130km쯤 아랑곳없이 택시를 타고 오는 눈사람처럼 하얀 영혼을 가진 사람처럼 말이다.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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