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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학습자들 정보 평등 이루는 게 우리 꿈”[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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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2-02 20:52:22 수정 : 2018-12-02 20: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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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영리 사단법인 ‘피치마켓’ 함의영 대표/불모지였던 느린학습자 책 시장/문학·노동법 등 쉬운 글로 출간/지원 사각지대 놓인 ‘경계성 지능’/권리 스스로 찾게 해 자립 도움/해외서도 관련사업 체계성 미흡/네팔·영국 등 콘텐츠 진출 준비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느린학습자’들은 성인이 돼서도 아동용 동화책을 읽어야만 합니다. 눈높이에 맞는 책이 없기 때문이죠. 이들도 청소년, 성인기가 되면 이성, 사회 문제 등으로 관심사가 바뀝니다. 그런데 아이들 책만 읽으라고 하니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자연스럽게 책 읽는 것을 멀리하게 됩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논현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비영리 사단법인 ‘피치마켓‘의 함의영(37·사진) 대표는 느린학습자들의 열악한 콘텐츠 환경을 이같이 지적했다. 느린학습자는 ‘경계성 지능’(지적장애에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보다는 낮은 인지 능력으로 일상생활 등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발달장애인 등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을 가리킨다. 피치마켓은 실질문맹개선과 정보평등을 위해 2015년 설립됐다. 한마디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 이름은 경제학 용어에서 따왔다. 중고차 거래 시장처럼 판매자보다 구매자 정보가 열악해 안 좋은 상품이 거래되는 곳을 레몬마켓이라 한다. 반면 판매자와 구매자의 정보가 일치할 때는 우량 상품이 거래되는데, 이 시장이 피치마켓이다. 함 대표는 “‘사회와 느린 학습자의 정보를 평등하게 맞추자’라는 뜻에서 피치마켓이라고 이름지었다”고 말했다.

느린학습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콘텐츠를 만드는 비영리 사단법인 ‘피치마켓’의 함의영 대표가 지난 26일 서울 논현동의 사무실에서 느린학습자들이 겪는 어려움 등을 설명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학부시절 법학을 전공했던 함 대표는 대학시절 전공 책 한 페이지를 해석하는데 한 시간이 걸리는 좌절을 겪으며 문장구조에 대한 고민을 하며 글을 통해 사회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국제 환경 문제 전담 기구인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에서 기획팀장으로 일하면서 만든 독서스터디에서 학부시절 생각했던 ‘사회에 변화를 주는 글 쓰는 일’을 실현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과감히 퇴사를 결정했다. “스터디원 멤버 중 한 명이 발달장애인 동생이 있었고 ‘그 친구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책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피치마켓이 탄생한거죠. (스터디원) 모두 안정적인 직장을 다녔기에 섣불리 퇴사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일단 저 혼자 (퇴사 후)시작하게 됐죠.”

피치마켓이 설립될 당시 느린학습자들을 위한 책 시장은 ‘불모지’였다. 피치마켓은 ‘오헨리 단편소설집’ 등 세계문학을 시작으로 한국 문학인 ‘김유정 소설집’까지 3년 새 30권에 달하는 왕성한 출판 작업을 했다. 고용노동부와 함께 노동법을 쉬운 글로 바꿨고, 행정안전부에서 매년 발간하는 백서인 ‘국민행동요령’도 발달장애인용으로 제작했다. 19대 대선과 6.13 지방선거 당시 후보들의 공약집을 알기 쉬운 글로 바꿔 배포하기도 했다. 피치마켓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에는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을, 이듬해에는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피치마켓을 설립하기 전 그가 처음 시도했던 책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이었지만 사실상 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함 대표는 고민 끝에 서울의 한 특수학교에서 1년 간 매주 2번씩 학교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학생들과 얘기도 나누고 숙제도 함께 하면서 학생들이 적는 글을 다 따라서 적었다. 나중에는 학생들 글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유머코드가 무엇인지, 어떨때 집중력이 떨어지는지 이해하게 됐고 그 직후 낸 책은 느린학습자들로부터 이해하기 쉽다는 평가를 받았다.”

함 대표가 가장 의미있는 작업으로 꼽는 책은 지난해 출간한 ‘피치의 분홍 공책’이다. 이 책은 근로기준법, 노동법에서 최소 필요한 사항들, 예컨대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때 몇 부를 만들어야 하는지’, ‘산재처리가 어떤 절차로 이뤄지는지’ 등을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는 “독서활동에 참여하는 발달장애인 학생들이 한 기업에 면접을 보러가서 ‘근로계약서 꼭 작성해야하는데 계약서 2부 쓰는 것 맞죠?’, ‘꼭 제 명의 통장으로 해주셔야 한다’라고 말했더니 면접관들이 놀라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더라”며 “‘염전노예 사건’같은 얘기가 뉴스에 나오듯 (느린학습자들이) 돈을 벌어도 자립이 안되는 이유 중 하나가 자기 권리를 스스로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시간에 이런 것들이 개선되는 모습이 놀라웠다”고 말했다.

함 대표는 경계성 지능을 위한 지원이 부족한 현실에 대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2400명이 넘는 학생이 피치마켓의 독서활동에 참여했다. 이 중 경계성 지능은 10명 당 3∼4명이다. 이마저도 특수학급에 소속된 학생들이다. 최근 전문가들 연구에 따르면 국내 경계성장애가 8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통계 자체가 없어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그는 “발달장애의 경우 장애등급을 받으면 정부지원을 받지만 경계성 지능은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자립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능이 낮아 이해 못한다는’ 편견으로 늘 폭언과 불합리한 대우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부분 자신이 (경계성 지능에) 해당하는지도 모른 채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알더라도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이를 숨기기도 한다”며 “이들을 찾아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의 활동은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부분 해외국가에서 느린학습자를 위한 사업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내년에는 발달장애인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네팔에서 현지 전문가들과 협력을 통해 콘텐츠를 만들 계획이다. 영국에서 영문판 느린학습자용 문학작품 출간도 준비 중이다. 그는 “시작부터 원대한 목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문화가정, 노인들, 새터민도 함께 참여를 시작하고 있다. 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관심사를 이해하는데 쉬운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가지고 그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 꿈”이라고 말했다.

남혜정 기자 hj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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