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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선수들 지도자 진출 기회 더 많아지길”[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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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1-18 20:41:50 수정 : 2018-11-18 20: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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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빙상 정상급 선수 활약하며/보조 코치 커리어 쌓기도 병행/머리 아닌 마음으로 학생들 지도/직접 선수생활 하니 고충 잘 알아/장애인 은퇴선수 취업 정책 미비
꿈 포기 않고 ‘유리천장’ 뚫을 것
“이것 좀 보세요.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보여준다니까요.”

그가 의기양양하게 내놓은 것은 딸의 ‘운동시작 전후’를 비교한 사진이다. 다이어트 효과 전시용은 아니었다. 앞머리로 이마를 덮은 채 유년 시절의 그을음을 간직한 중학생 소녀는 몇 년 뒤 빙판과 트랙을 누비는 장애인체육 선수가 돼 몰라보게 밝아졌다.
지적장애인 체육선수 김진영(오른쪽)과 아버지 김세웅씨가 17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대한장애인체육회 체육인지원센터에서 지도자의 꿈을 이야기하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자랑할 건 이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빙상스케이팅 교실의 보조 코치로 사회복지 자원봉사에 3년간 115회(287시간)나 참여했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는 21일 제9회 한국지역발전대상 행정안전부장관 봉사상까지 수상한다. 장애인체육계에서 가장 ‘핫’한 부녀가 아버지 김세웅(52)씨와 육상 겸 빙상 선수 김진영(19·광주시장애인체육회)이다.

17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대한장애인체육회 체육인지원센터에서 진행된 체육전문가(지도자) 양성교육 현장에서 이들을 만났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지난 4월 센터 내에 은퇴선수지원팀을 구성했고, 11월부터 취업지원 교육을 처음으로 실시 중이다. 45명의 교육 참가자 중에서 김진영이 유독 눈에 띄는 건 ‘최연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적장애 2급인 김진영은 유일한 발달장애인 참가자다. 그의 옆에는 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트북을 끼고 ‘필기’에 열중인 아버지 김씨가 있다. 아직 전례는 없지만, 김진영은 특수학교나 실업팀 등에서 지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체육지도자가 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장애는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남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안고 가는 거죠. 교육자로서 제 강점은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 성격입니다. 특히 쇼트트랙은 최대한 엉덩이를 낮춰 허리를 숙이는 게 중요해요. 선수로 활동한 덕분에 학생들의 고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김진영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비록 표현이 서툴러 아버지의 부연설명이 더해져야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대화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만큼은 또렷했다. 그는 지난 9월 인도네시아 장애인아시안게임 육상(T20·지적장애)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등 최정상급 선수로 올라섰다. 또한 지난해 대한장애인체육회 빙상 부문 여자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동·하계 종목을 아울러 활약 중이다.

실력뿐 아니라 어엿한 보조 코치로 커리어를 쌓아나가는 데는 아버지 김씨의 헌신이 컸다. 딸이 자폐성 장애를 가졌다는 건 그가 5살 때야 알았다. 부랴부랴 발달장애 교육기관에서 4년 동안 교육을 시켰지만, 곧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산산이 깨졌다. 점차 폭력적으로 변하는 데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딸을 보면 억장이 무너졌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우연히 빙상 종목을 접한 딸은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조 코치로 활동하면서도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며 반항하는 학생들을 버거워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코치님”이라 부를수록 제법 의젓한 면모를 뽐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적장애인 아이들을 누구보다 잘 다룰 줄 아는 전문가다.

“장애인 체육지도자들이 아직까지 비장애인 위주로 구성돼 아쉬워요. 이 때문에 국가대표로 활동해도 은퇴 후에는 할 일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국제대회 금메달을 따내도 장애연금 수급자로 생활해야 해요. 자신이 재능을 가진 분야에서 장애인의 사회참여 기회가 더욱 많아졌으면 합니다.”

김진영의 체육 인생은 통과해야 할 가시덤불이 많다. 숱한 메달도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는 게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 장애인체육의 저변이 좁은 한국은 2015년에야 뒤늦게 장애인스포츠지도사 자격증 제도가 신설됐다. 지난 3월 기준으로 자격증 취득자는 도합 1515명에 불과한데 이마저 비장애인이 대부분이다. 그간 장애인체육 은퇴 선수를 위한 취업 연계 정책이 미비했던 탓이 컸다. 일례로 2008 베이징 패럴림픽 휠체어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홍석만(42) 역시 은퇴 전부터 스스로 한체대 특수체육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끝에 지난해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선수위원으로 선정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은 있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장애 체육인들의 취업 연계 프로그램을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하면서 고용노동부 산하 장애인고용공단과 협업을 추진 중이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장애인의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세운 비영리단체(NGO)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모인다면 장애인체육계의 ‘유리 천장’을 뚫어야 하는 김진영 역시 자신의 꿈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전망이다.

“운동이 즐겁긴 하지만 힘든 측면이 더 커요. 그래도 사회의 일원으로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 뿌듯합니다. 지적장애인 아이들의 손을 제가 놓지 않는다면, 그들도 저처럼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웃음을 되찾을 수 있겠죠?” 어눌한 말투로 훌쩍 자란 속내를 내비친 그는 곧장 강의실로 돌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안병수 기자 ra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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