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대결 구도 속 정책 합리성 뒷전/선거 대비한 의원들, ‘쪽지예산’ 혈안/기간 확대·회의 모두 공개 대안 거론/시민단체, 예산법률주의 도입 주장도
◆다투다가 ‘짬짜미’, 바쁘니까 ‘벼락치기’
국가재정법 제33조는 정부가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9월3일)까지 국회에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헌법 제54조에 따라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12월2일)에 예산안을 의결해야 한다. 현행법은 국회가 정부 예산안을 넘겨받아 약 3개월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정기국회가 9월 초에 문을 열어도 대정부질문과 국정감사 일정을 감안하면, 10월 말이나 11월 초가 돼야 본격적인 예산 정국에 돌입할 수 있다. 실제적인 예산안 심의 기간이 한 달 남짓한 것이다. 여야 간 정쟁으로 국회가 공전하게 되면, 실질적으로 협상 테이블이 가동되는 날짜는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6일 새벽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공무원 9475명 증원과 법인세 최고세율 과세표준 구간 신설, 일자리 안정자금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긴 2018년도 예산안이 통과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매년 예산안 날림 심사가 불가피하다보니 여야 간 나눠먹기식 ‘짬짜미’도 관행처럼 자리를 잡았다. 언론에 공개되는 상임위와 예결위 소위 단계에서는 비쟁점 예산만 논의한 뒤 핵심 예산은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만 참석하는 일명 ‘소소위’나 지도부 간 담판에 의존하고 있다. 논의 내용이 속기록에 남지 않는 ‘깜깜이 심사’여서 취재진은 물론 의원들도 협상과정을 알 길이 없다.
정부 예산안에 없는 사업이지만, 예비타당성조사나 기초설계에 필요한 비용만 소액으로 편성했다가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예산을 확보하는 식의 ‘문지방 예산’도 만연해 있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의 경우 일단 시작하고 나면 중간에 사업을 중단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수법이다.
◆예산 따와야 ‘실세’ 등극하는 구조가 문제
잘못된 예산안 심사 관행은 우리나라의 정치구조적 문제점과 맞닿아 있다. 정당을 중심으로 한 여야 대결구도에서는 여당은 정부 예산안을 원안 그대로 통과시키려고 하고, 야당은 최대한 삭감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또 국회의 증액 심사가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탓에 정책의 합리성보다는 의원 개개인의 영향력에 따라 예산안 규모가 좌지우지되는 결과도 허다하다. 지역구 의원들은 예산을 얼마나 따내느냐에 따라 다음 선거에서 지역주민의 평가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에 쪽지든 청탁이든 ‘묻지마 예산’ 확보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예산안 심사 기간을 대폭 늘리고, 예산 관련 회의는 원칙적으로 모두 공개하는 방안이 우선 거론된다. 불과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예산안 심의를 마치는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 선진국은 3개월 이상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예산안을 살피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 의회는 대통령이 매년 2월 첫째주 월요일에 예산안을 제출하면 회계연도가 시작되는 10월 1일까지 약 8개월간 심사에 심사를 거듭한다. 예산안 협상도 우리나라처럼 당내 소수 의원이 주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상·하원 공개 회의에서 결정하는 방식이다. 예산 관련 회의에서 개별 의원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이의가 제기되면 최종 판단까지 다른 의사진행 절차가 모두 중단된다.
예산의 목적과 내용, 제약 등은 물론 지출 한도와 기한까지 법률 형식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이를 어길 경우 제재를 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오세형 경실련 경제정책팀 간사는 “예산안은 심사 이전 편성 단계부터 부처 간 알력이나 지역구 의원의 입김이 작용한다”며 “근원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한 예산법률주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세준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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