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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 의병, 애국으로 일어나 이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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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1-17 10:32:23 수정 : 2018-11-17 11:4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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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지난 9월 30일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장승구(최무성)는 제자이자 의병인 고애신(김태리)에게 의병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비록 드라마지만, 의병을 가장 함축적으로 설명한 대사이기도 했다.

1907년 충북 충주 부근에서 영국 기자 맥킨지에 의해 촬영된 의병의 모습. 위키피디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한제국 전역에서는 의병들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격파한 동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한 의병들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었다.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 거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던 사람들, 일본군에 무기를 빼앗긴 군인들, 집에서 바느질을 하던 여인들…. 이른바 ‘민초’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친일이라는 편한 인생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조국을 위해 무기를 들었던 의병과 그들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독립군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정한 순국선열이다.

◆사진도, 행적도 남아있지 않은 의병

일제에 저항하는 의미를 지닌 의병은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에 반발해 1896년 1~3월 봉기한 을미의병이다.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에서 시작된 의병 봉기는 경상도와 전라도, 함경도까지 번지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됐다.

을미의병은 지방의 유생이나 전직 관리들이 이끌었다. 이들이 지휘하는 의병들은 관찰사나 군수, 순검 등을 처단하고 군사시설을 점령한 뒤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웠다. 철도 등 일본군 시설을 파괴하거나 주둔지를 공격했다. 을미의병에 참가한 의병은 기록된 것만 5만여명이 넘는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을 공격으로 패퇴했으며,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권이 무너지자 의병 활동은 힘을 잃었다.

잠잠해졌던 의병활동은 1907년 고종 황제 퇴위와 군대 해산으로 다시 타올랐다. 1910년까지 지속된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안중근, 홍범도, 이범윤 등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도 이 때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다. 정미의병은 1908년 1월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 1만여명의 군대를 구성해 한성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이후 일본군의 대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채 만주로 이동, 독립군의 기반이 됐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저격수 고애신(김태리)은 양반집 애기씨임에도 총을 잡고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 tvN 캡쳐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에 참가했던 ‘민초’들은 수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사형당했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순국한 의병도 있다. 1906년부터 의병 활동을 했던 김경화는 광주감옥에 갇혀 있던 1910년 8월, 함께 싸웠던 전해산 의병장이 순국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일제가 그를 회유하자 “귀가 더럽혀졌다”며 거부한 뒤 자결했다.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선 의병들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와 공훈록에 저장된 의병은 2600여명에 불과하다. 의병 규모가 수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숫자다.

이들 중 국가보훈처가 매달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지도자급 인물을 제외하면 사진이나 초상화가 남아있는 인물은 거의 없으며, 행적은 물론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의병으로 활동한 사람들 대부분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민초’였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1909년 호남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한 공로로 2013년 건국포장이 추서된 강금성의 경우 1909년 10월 15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사망한 날짜와 얼굴 모습은 알 길이 없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고문성도 마찬가지다. 고문성은 1907년부터 의병을 위해 군자금을 모으다 1911년 3월 3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나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육사 교정에 세워진 독립운동가들의 흉상. 지난해 세워진 것으로 군 당국은 독립군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육군 제공
◆‘의병→독립군→국군’ 계승, 순국선열 기리는 방법

의병 활동이 쇠퇴하던 1910년, 대한제국은 그 문을 닫았다. 경술국치가 찾아온 것이다.

한반도에서 태극기를 내걸 수 없게 된 1910년 겨울,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6형제의 가족들은 전재산을 처분한 당시 돈 40만원(600억원)을 갖고 압록강을 건넜다.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 위한 오블리스 노블리주였다. 이들은 뜻을 함께하는 지사들을 모아 1911년 6월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12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 등장한 생계형 독립군 속사포(조진웅)가 다녔다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의 압력을 폐교될 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양성한 독립운동의 요람이다.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에서 이뤄진 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도했다. 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한 봉오동 전투(1920년), 대대적인 토벌에 나선 일본군을 격파한 청산리 전투(1921년)의 주역인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이름이 전해진 것은 이청천 등 일부에 불과하다.

만주사변 등으로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1930년대, 무장투쟁 중심지는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4년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뤄양에 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을 설치, 1935년까지 85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김구가 모집한 청년들과 만주에서 이동한 독립군 대원들로 구성됐다.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도 이 무렵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하며 의열단의 투쟁노선을 이끌어갈 간부를 양성했다. 김구와 김원봉은 이념적 성향이 달랐으나 이때부터 군사활동 과정에서 서로 공조를 했다. 

육군사관학교에 전시된 광복군 군복. 육군 제공
1930년대 독립군 양성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초로 국군을 갖게 되는 순간이었다. 광복군은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리는 선전활동, 연합군과의 합동작전 등에 참가했다.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등록된 광복군은 560여명이나 실제 인원은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군은 국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독립운동에 대한 부분은 잘 언급하지 않았다. 광복군을 비롯한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설명하면서도 독립군의 역사를 국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소극적이었다. 2011년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가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 행사를 육사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육군사관학교 교과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독립군과 광복군의 국군 계승과정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6월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이 개최됐다. 최근에는 육군의 주도로 뮤지컬 ‘신흥무관학교’가 공연됐다. 

일본군이 압수한 의병들의 무기. 대부분 화승총으로 의병들이 제작한 무기지만 일본군의 화력에 중과부적이었다. 독립기념관 제공
군 당국이 독립군의 역사를 우리 군의 일부로 편입하는 작업을 시작했지만 성과는 미지수다.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던 순국선열의 흔적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이완용의 주도로 대한제국 정부가 해체되면서 의병에 가담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기록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이 폐기됐다. 1945년 8월 일제 패망 당시 관동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 서대문형무소 등에 보관되어 있던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일제가 폐기하거나 6.25 전쟁으로 소실됐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6.25 전쟁이나 임진왜란 등에 연구 초점이 맞춰지면서 항일무장투쟁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실체 규명 작업에 난항이 예상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름도, 사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의병과 독립군의 뜨거운 애국심을 다시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진정으로 숨을 거둔다. 우리 군이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투쟁 역사를 되살리고, 군인들에게 이 역사를 잊지 않도록 가르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독립군에서 국군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이름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순국선열에게 군 당국이 보답하는 최소한의 자세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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