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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고 덧붙이고… 건축, 시공간을 넘나들다 [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입력 : 2018-11-17 18:12:24 수정 : 2018-11-17 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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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시간의 문/기억이란 시간의 흔적/삶은 그 위로 흘러가/영원한 현재 속에 살아/기억과 연상을 통해/자기동일성 가지게 돼 / 조선시대 정원 소쇄원 / 안과 밖이 묘하게 섞여 / 다차원적인 공간 느껴 / 공간에 시간 덧붙이면 / 깊이 헤아리 # 기억이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정신의학자 카를 융의 자서전을 보면 그의 기억력은 무척 비상해서 갓난아기 시절 유모차에 누워있을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을 읽게 된다. 무척 놀라운 능력인데, 그 정도의 대단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끔 있다고 한다. 그런 증상을 정신의학 측면에서는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이라고 한다.

과잉기억증후군이란 과거의 기억을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게 기억하는 정신 상태 혹은 능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런 기억은 학습능력나 인지능력이 우월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담당하는 우전두엽뿐 아니라 좌전두엽까지 기억을 담아내면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나는 과잉기억증후군 정도는 아니지만 무척 오래 전의 일들을 기억해내곤 한다. 카를 융만큼 요람의 기억은 아니지만 네 살 때 우리 집의 공간들과 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어느 날 사촌형이 갑자기 우리 식구들을 불러내 집 앞에 나란히 세워놓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의 동네 풍경, 날씨 등등이 방금 찍어서 주르륵 밀려나오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뿐 아니라 본인도 기억 못 하는 누나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내가 기억해내서 고맙다는 인사 대신 좀 이상한 아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 간혹 이상한 아이가 되기도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보는 일을 무척 즐겨 가끔 시간의 문을 열고 오래된 기억을 꺼내보곤 한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도 뭐든지 외우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특히 외울 것이 많은 역사나 지리 과목을 좋아했다. 좀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심지어 수학도 푸는 게 아니라 문제 유형에 따른 해법을 달달 외워서 시험을 봤다. 그런 방식은 중학교 때까지는 어느 정도 통하기도 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통하지 않게 되었지만….

나의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과거를 기억하는 행위는 머릿속에 수납되어있는 이미지를 꺼내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이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혹은 시간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기억의 영역은 10여 년 전에 적당히 확장을 멈춘 듯하다. 요즘 굉장히 신기한 것은 어제, 그제의 일은 기억이 희미하고 벌어진 사건의 순서도 뒤죽박죽 뒤섞여 있는데, 40년 전 혹은 더 이전의 일은 아주 정연하고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우리를 훑고 지나가는 시간의 흔적 안에서 삶을 이어간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시간이란 앞으로 주욱 진행되는 방향성이 있는 시간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늘 현재 속에서 살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이윽고 미래는 다시 현재로 수렴되며 또한 지나간 과거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에 살면서 과거 혹은 미래에 생각하며 기억과 사유를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과거 현재 미래를 머릿속으로 통합하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지구상에서 먹이사슬 가장 꼭대기에 앉게 되었을 것이다.

시간의 속성은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시간 속에서 살고 있다. 늘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현재들이 하나의 부드러운 흐름으로 느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기억과 연상을 통해 시간이 이어지고 ‘자기 동일성’을 확보하게 된다. 어제의 나를 기억하고 먼 과거의 나도 기억한다. 또한 어제의 공간과 먼 과거의 공간들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이 흐트러지는 순간 공간 역시 큰 혼란이 오고 마구 뒤섞이게 된다.

조선시대 별서정원인 소쇄원이라는 곳에 가면 뫼비우스의 띠나 크라인씨의 병처럼 안과 밖이 묘하게 섞이며 공간의 감각을 혼돈스럽게 만드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 시간이 덧붙여진 건축, 시간을 지워버리는 건축

건축 역시 시간 속에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탕 위에서 인간은 느끼고 판단하게 된다. 또한 시간을 품고 있는 건물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단순한 물성에 대한 감성에 더하여, 우리에게 시간의 흔적이 주는 감성이 보태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은 늘 시간에 대해 고민하고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어떻게 건축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우리는 3차원에 산다. 선이라는 1차원과 면이라는 2차원 그리고 공간이라는 3차원에 시간의 차원이 들어가는 시공간이 4차원의 공간이라는데, 물론 우리의 감각은 4차원을 느낄 수조차 없다. 우리는 3차원에 갇힌 채 영원히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4차원의 공간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공간과 바로 붙어 있다. 가끔 시간을 거스르기도 하고 앞서 나가기도 하며 우리의 감각을 혼돈케 하는 공간을 간혹 만날 때가 있다.

가령 담양에 있는 조선시대 별서정원인 소쇄원이라는 곳에 가면 뫼비우스의 띠나 크라인씨의 병처럼 안과 밖이 묘하게 섞이며 공간 감각을 혼돈스럽게 만드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물론 그 당시 그 별서정원을 조영한 사람이 그런 4차원에 대한 개념을 구현하고자 하는 개념을 가지고 조성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역의 중간을 관통하며 흘러 다니는 담장과 그 담장과 교차하며 흐르는 물길을 통해 정원 안에서 조금씩 이동할 때마다 아주 다차원적인 공간을 체험할 수 있다. 하나의 영역으로 보였던 정원은 물길을 건너고 제월당, 광풍각 등을 거쳐 다시 내려오는 여러 개의 영역이 교차하며 점점 넓어진다. 그리고 결국 한 바퀴 돌아 처음 출발했던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환적이며 입체적인 동선은 끝나거나 다시 시작된다. 처음 대숲을 지나 초입에 들어서서 볼 때 한눈에 들어왔던 소쇄원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은 정원이라는 인상을 받지만,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온 뒤에는 한정된 공간에 시간이 덧붙여지며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한없이 넓은 곳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간의 감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건축도 있다.

그곳은 건축이 소멸된 곳, 말하자면 폐허로 남은 공간이다.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는 곳이 예전에 절이 있었던 곳에 건축은 불이 나거나 홍수가 나거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거의 없어지고 터나 돌로 된 조형물만 남은 곳이다. 우리나라에 수천 곳의 폐사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우리가 잘 아는 황룡사지나 미륵사지 같은 곳이다. 그곳에는 기단이나 석탑 등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고 인적이 아주 드물며, 고요라는 단어로도 부족한 적막감이 짙은 안개처럼 땅을 내리 누르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생각이 지워지고 감각이 둔해지며 시간이 사라진다. 그냥 존재하는 것들이 이루고 있는 물질이나 종의 특성마저 지워진 채, 어떤 시간과 공간이 마구 버무려진 상황에 있을 뿐이다. 그런 느낌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하루 종일 그 안에 앉아 있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어떤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고, 바다가 깊다는데 아마도 그런 정도의 깊이는 될 듯하다.

황룡사나 미륵사처럼 절터가 어느 정도 발굴되어 옛날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곳이 있는 반면, 절이 있었다니 하며 의아하게 만드는 곳도 많다. 풀이 무성하고 언뜻언뜻 바윗돌처럼 보이는 것들이 숨어있는데, 자세히 보면 기단이나 석등 받침 혹은 불상이 앉았던 연화대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시간을 두고 그곳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감았던 눈을 뜨듯 하나하나 바닥에 잠겨 있던 시간들이 서서히 일어나 환영처럼 그곳의 옛 모습이 그려지고, 심지어 마치 내게 그 곳에 대한 어떤 기억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당간지주 외에는 별다른 흔적도 없고 자국도 희미했지만 1000년이 넘는 과거의 공간을 넘나드는 듯한, 마치 어떤 시간의 문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먼 과거의 기억이 나에게 들어오는 듯했다.
# 굴산사지, 천년 이전의 과거를 더듬는 시간의 문

지루하고 무척 더웠던 여름이 끝나가는 9월 첫날 굴산사지(?山寺址)에 가기 위해 강릉으로 갔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공양보살상이 유명한 신복사지를 먼저 들렀다. 무릎을 꿇은 독특한 자세로 석탑 앞에서 조아리고 있는 보살상은 강릉 한송사와 오대산 월정사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불상이다. 그래서 먼저 오대산에 들러 월정사 공양보살상을 보았고 신복사지에도 들렀다.

강릉에는 객사문과 선교장, 강릉향교 등을 보기 위해 몇 번 들르기는 했지만, 굴산사지는 가볼 여건이 되지 않아 이번이 초행길이 된 것이다. 잔디가 깔리고 깔끔하게 정비된 신복사지에서 나서 2차선 국도를 달리다가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니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바로 넓게 논이 펼쳐져 있었다. 산은 멀리 있었고 실하게 익은 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서 오른쪽을 바라보니 멀리 우뚝 솟은 두 개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너른 들에 서있는 두 개의 돌기둥은 감은사지에 처음 갔을 때 정도의 강한 느낌을 주었다. 당간지주는 글자 그대로 당(幢:불화를 그린 기)을 걸었던 장대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워진 기둥인데, 멀리서도 사찰의 위치나 행사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또한 여기서부터 절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기록은 있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보아 소도, 장승과 같은 형태가 불교문화에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굴산사라는 절은 신라가 거의 기우는 시점인 847년, 문성왕 9년에 범일국사라는 스님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범일국사는 동해 삼화사(三和寺)를 세우고 양양의 낙산사(洛山寺)를 중건했으며 강릉 신복사(神福寺)도 건립했다고 한다. 당시 영동 지역의 사찰이 선종으로 전환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지금도 강릉단오제의 제의를 받고 있다. 처음 지어질 때는 신라 왕손이며 명주군왕으로 책봉된, 강릉 김씨의 시조 김주원의 후원으로 무척 큰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반경이 300m 정도 되고 상주하는 승려가 200여 명나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절이 어느 시점에 쓰러졌는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잊혀 있다가 1936년 홍수로 굴산사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가 땅에서 드러나며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한 파인 사굴산문(??山門)의 본산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조선시대 이전에 이미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우뚝 솟은 당간지주밖에 없다. 좀 더 들어가면 범일국사의 부도와 돌로 만든 불상이 있긴 하지만, 당간지주의 인상이 워낙 강렬해서 다른 것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간지주는 5.4m의 높이로 우리나라에게 가장 크다. 검은빛이 감도는 돌을 거칠게 다듬어 세워놓았는데, 그 안에 세워졌을 당간은 20m 가까이 되었을 테니 당시의 상황으로는 엄청난 모뉴먼트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날은 구름과 태양이 멋지게 어우러지던 날이었고 강렬했지만 지금은 퇴장하는 여름의 뒤통수였다. 오후 3시의 햇볕이 아주 강하게 내려쬐고 있었고, 당간지주 2기와 나만 그 너른 벌판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오후의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며 당간지주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에서 며칠이고 그 앞에 앉아 있을 것 같았다.흔적도 없고 아무런 자국도 희미했지만 1000년이 넘는 과거의 공간을 넘나드는 듯한, 마치 어떤 시간의 문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 내가 겪어보지도 못한 먼 과거의 기억이 나에게 들어오는 듯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골목 인문학』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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