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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규정 없으면 언제든 파기 가능 / 지킬 수밖에 없도록 치열한 논의를 언어는 사람이 각자의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여 합리적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이다. 나라와 세계의 차원에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설 때 지루한 협상을 통해 이해 당사자가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에 이르면 그 내용을 공표한다. 그 내용이 기자회견을 통해 숱한 합의서, 선언서, 헌장, 조약으로 알려지게 된다. 세계사로 보면 1689년 영국의 ‘권리장전’,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등이 있고 우리나라로 보면 1953년의 ‘정전협정’, 2018년의 ‘평양선언’ 등이 있다. 이밖에도 여야가 막힌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발표하는 합의서도 있고 생업과 일상에서 공동으로 지켜야 할 약속을 정하는 경우도 있다.

합의는 과거에 보였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는 이해 당사자가 미래에 준수해야 할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고 현재의 불확실성을 극복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는 예측 가능성을 제시하는 시대의 방향이기도 하다. 합의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숱한 합의서가 많지만 그대로 실현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극단적인 경우 합의서를 공표했지만 이해 당사자가 곧바로 합의문에 담긴 단어와 내용을 두고 재차 갑론을박을 벌여서 합의하기 이전보다 더 극단적인 대치로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도 있다. 합의가 역설적으로 상황을 더 꼬이게 하기도 한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합의의 파기는 합의 그 특성에 연유한다. 합의는 일종의 약속이다. 약속(約束)은 원래 당사자들이 합의된 내용을 받아들여 스스로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므로 묶는다는 기본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때 사람은 지키겠다고 하여 약속을 하지만 현실에서 약속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한번 약속을 하면 약속을 지키는 쪽도 있고 어기는 쪽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계약을 비롯한 약속의 형태는 특정한 내용을 지키는 규정만이 아니라 그 내용을 어겼을 때 어떤 불이익을 받아들인다는 처벌 조항이 함께 들어있다. 규정만 있고 처벌 조항이 없으면 약속을 지키는 쪽만 손해를 보게 되고 규정이 없고 처벌 조항만 있으면 애초에 약속이 이루어지기가 어렵다. 합의는 역설적으로 이해 당사자가 서로 약속을 지키리라는 신뢰를 가지면서 동시에 지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바탕에 두고 있다.

이렇게 보면 합의가 잘 지켜지기 위한 형식이 필요하다. 의심을 가지면서 그 의심이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에게 필요한 규제를 하여 최종적으로 서로 약속을 지키리라는 신뢰를 쌓게 해야 한다. 이에 이해 당사자가 상황에 내몰려서 극적인 합의를 거둬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만큼이나 합의가 현실에 그대로 실현되는 세세한 길도 중요하다. 끊임없이 특정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도록 치열한 논의를 펼쳐야 한다. 논의가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합의를 지키겠다는 열의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논의가 싱겁게 끝나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에 의해 합의가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따라서 합의를 공표만 해놓고 그 합의를 지키지 않았을 때 어떤 처벌을 한다는 규정이 없으면 합의서는 기껏 종이에 합의의 내용을 기록한 합의‘서(書)’일 뿐이지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합의‘서(誓)’가 될 수가 없다.

합의가 잘 지켜질 수밖에 없는 좋은 모델이 있다. 정부재정지원 사업을 받아 외국의 학자를 초청하여 강연을 하는 경우이다. 신분증 사본의 제출은 기본이고 비행기 항공권 구매 사실, 왕복 탑승권, 자국의 귀국 사실 증명이 필요하다. 항공권을 샀지만 실제로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탑승권이 필요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더라도 도중에 입국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귀국 사실 증명이 필요하다. 이렇게 제반 사실을 증명하게 되면 초청 학자는 출발지에서 초청지로 다시 초청지에서 출발지로 오고 갔다는 점을 완벽하게 증명하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합의는 끊임없이 의심할 때 오히려 어기지 않고 반드시 지킬 수밖에 없는 길을 찾게 된다. 무한한 신뢰에 바탕을 둔 합의는 신들의 경지라면 모를까 사람의 경우에 일어나기 어렵다. 그만큼 사람은 상대만이 아니라 자신도 약속을 지킨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교수 동양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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