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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뿌리 염색’을 하는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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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1-09 23:12:16 수정 : 2018-11-09 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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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데 왜 벌써 백발 됐느냐 / 얼마나 게으르면 염색도 안 하냐 / 안 들어도 될 소리 사전차단 방책 / 있는 그대로 다닐 수 있는 날 오길 주기적으로 염색을 한다. 한 달에 한 번쯤. 외모를 가꾸는 일에 그다지 소질도 취미도 없으면서 미장원에 전화를 걸어 염색할 수 있는 날을 예약하고 그러고도 예약한 날을 잊어버릴까 봐 휴대전화 일정에 등록하고 알람까지 설정해둔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예약한 날짜와 시간을 엄격하게 지킨다. 벌써 20년째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이 ‘의식’처럼 행하는 ‘뿌리 염색’의 번거로움을 감수하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직 젊은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벌써 백발이 됐느냐는 걱정 섞인 말부터 얼마나 게으르면 새치 염색도 안 하고 다니느냐는 핀잔 섞인 말까지. 바꾸어 말하면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말을 주고받을 시간에 훨씬 생산적이고 쓸모 있는 김장 배추 이야기나 태양초 고춧가루 이야기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현미 시인

어머니는 집에서 새치 염색을 했다. 약국에서 사 온 값싼 염색약을 물에 섞고 염색약과 함께 들어있던 비닐을 망토처럼 두르고 칫솔모가 다 닳은 칫솔에 염색약을 묻혀 손거울을 들고 손수 새치를 꼼꼼하게 바르곤 했다. 손거울로 볼 수 없는 뒤통수 쪽은 꼭 내게 발라달라고 했는데, 그때마다 투덜대며 새치 염색을 도와드리곤 했다. “아이고, 우리 딸 미장원 아줌마보다 훨씬 낫네” 하며 꼼꼼하게 바르는지 손거울로 확인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설마 미용학원 근처에도 못 가본 어린 딸이 미용기술을 배운 미장원 아줌마보다 더 나았겠는가.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한 소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는데 철없던 나는 제발 염색은 미장원에 가서 하라고 매번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참 철딱서니 없는 딸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런 어머니처럼 매달 염색을 하고 있다. 20년째 매달 주기적으로 염색을 하고 있으니 나의 ‘뿌리 염색’의 역사도 길다면 긴 역사이다. 얼추 헤아려보면 200번도 넘게 염색을 했고, 매번 갈 때마다 2시간쯤 소요되니 염색을 하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 시간과 돈을 모았으면 새 차를 뽑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한때는 나도 어머니처럼 한 푼이라도 아껴보겠다고 홈쇼핑 쇼호스트의 주옥 같은 상품설명에 혹해서 호기롭게 10개 묶음 세트를 주문했다가 혼자 염색하는 게 어렵고 번거로운 일이어서 유통기한이 넘어가 고스란히 버린 적도 있다. 미장원에서 사용하는 일반 염색약은 두피가 따갑고 며칠씩 염색약 냄새가 가시지 않아 천연 염색인 헤나 염색을 하는 미용실을 찾아다닌 적도 있지만 매번 먼 거리에 있는 미용실에 다니는 것도 여의치 않아 지금은 그냥 집에서 가까운 예약제 미용실에 다니고 있다.

외모를 가꾸는 일에는 소질이나 취미가 없지만 오랫동안 ‘뿌리 염색’을 하다 보니 이제 ‘뿌리 염색’이라는 말은 내게 외모를 가꾸는 일이면서 하얗게 탈색된 영혼의 뿌리를 생기 있게 가꾸는 은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 잠깐, 청춘의 시절과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풍성하고 무성하던 머리카락이 빠져버린 모습을 보고 실은 머리카락이 뇌 속으로 자라고 있다고 상상한 재미있는 시 한 편이 떠오른다. “그의 머리카락이 뇌 속으로 자라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저 그를 보면 대머리라고/ 깔깔대느라고 바쁠 뿐이다 그는 뇌 속으로 머리카락이/ 엉켜 폭발 직전인데 빗질조차 할 방법이 없다.”(대머리와의 사랑2, 성미정). 시인들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보이는 것(새치)을 감쪽같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니 미용사도 시인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다니고 있는 미용실에는 ‘봉구’라는 고양이가 있다. 봉구야! 라고 부르면 무릎에 올라와 꾹꾹이를 한다. 녀석에게는 왼쪽 뒷다리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없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봉구는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다. 조만간 내게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백발을 휘날리는 멋진 시간이 올 것이다.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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