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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만행부터 초코파이 나눠먹기까지… JSA에 새겨진 분단의 추억들

입력 : 2018-10-27 12:08:15 수정 : 2018-10-27 12:4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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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토리 뉴스] JSA와 한국사 추억들 영화속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JSA는 2000년 이영애· 이병헌· 송강호· 신하균 주연의 영화로 유명하며, 2017년 11월 13일 북한병사가 JSA를 통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다시한번 주목받기도 했다. JSA하면 '선글라스를 낀 JSA경비헌병'모습을 제일 먼저 떠 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 비무장화 조치로 권총을 차고 각을 잡은 채 서로를 노려보던 JSA경비병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돼서다.
영화 JSA 포스터.
남과 북은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서 합의서에 따라 'JSA 비무장화' 작업을 25일 완료, 26일부터 이틀간 양측이 검증작업에 나섰다.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28일부터 하루 8시간(오전 9시~오후5시) JSA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된다. JSA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으로 선글라스 JSA 헌병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널문리와 주막을 뜻하는 점막 한자식 이름, 판문점

판문점(板門店) 옛 이름은 널문리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피난갈 때 백성들이 널빤지로 다리 혹은 배를 만들어 피난을 도왔다는 것에서 유례했다는 설이 있다.

1951년 10월 7일 휴전협상이 경기도 장단군 널문리에서 시작됐다. 회담장은 초갓집 4채만 있는 벌판위, 점막(주점)앞에 지어졌다. 협상장소를 한글, 중국어, 영어로 표기해야 했지만 널문리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자 널문리와 점막을 합해 판문점이라는 이름이 새로 만들어졌다. 
953년 7월 판문점 모습. 헬리콥터쪽이 남측방향, 하얀지붕이 판문점 북측 지역이다. 국가기록원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하면서 동면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판문점은 남과북으로 갈린 채 양측의 회담장소로 이용돼 왔다.

공동경비구역이라는 말자체가 말해 주듯이 판문점 JSA는 함께 사용하는 곳으로 한국과 유엔군, 북한군 정전위 관계자들이 비무장 차림으로 자유롭게 오고 다녔다. 1976년 8월까지 이렇게 왕래가 가능했다.

◆1976년 도끼만행사건, 데프콘2와 함께 '분할' 경비로

JSA에서 남북이 부동자세로 상대를 노려 보게된 것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태 이후다.

7월 18일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3초소 부근에 있던 12m 높이의 미루나무로 인해 관측이 힘들자 제거에 나섰다.

북한측이 반대했지만 오전 10시 30분쯤 유엔사 경비대장 보니파스(Arthur G. Bonifas) 대위와 바레트(Mark T. Barret) 중위, 그리고 한국군 대위 한 명이 경비병 7 명과 근로자 5 명을 데리고 작업을 강행하자 북한군 30여명이 도끼와 쇠망치를 휘둘렀다. 
도끼만행으로 쓰러진 보니파스대위(가운데). 미국방부 자료사진

이 일로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가 사망하고 미군 4명, 한국군 2명이 부상 당했다.

격분한 한미 양국은 휴전후 처음으로 데프콘3(전투 경계태세)에 이어 데프콘2(전투 준비태세· 전투편제 100%구성)를 발령하고 미루나무를 제거했다.

모든 병사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즉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데프콘2가 발령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이었다.

양측은 충돌 방지를 위해서 콘크리트턱으로 군사분계선을 표시, 어떤 군인들도 군사분계선을 넘어 상대 측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름은 공동경비구역이지만 실제로는 분할경비구역으로 바뀌었다.

◆남북회담장, 북한군 탈출, 남북병사 몰래 만남 등 숱한 사연
북한병사 탈출. 연합뉴스TV 캡처

JSA는 시야가 터여있는 곳이기에 1967년 3월 이수근 망명, 1984년 11월 소련 관광객 망명, 2017년 11월 북한군 병사의 ‘필사의 JSA탈출’ 등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이 과정에서 남과북이 총격전까지 벌여 양측에서 사상자가 난 아픈 역사도 있다.

JSA는 이외에도 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영화 JSA는 군의 대표적 의문사 중 하나로 1998년 2월 24일 JSA경비대대 소속 김훈 중위 사망사건을 모티브로 꾸며졌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남과북 병사가 몰래 만나곤 했다는 의혹과 '초코파이를 나눠 먹었다' 일부 병사들의 무용담(?)을 영화속에 녹여 냈다. 

통일로 가는 경험이 어려 있기도 하다. 1998년 6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소떼 1001마리와 함께 JSA를 거쳐 북으로 간 '소떼 방북'도 유명하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북측 지역으로 갔다가 넘어오기도 했다.

◆JSA 근무병은 '폼' 나지만 3D 보직

JSA 경비는 2004년 11월 한국군에 완전 이양될 때까지 미군이 맡았다. 도끼만행으로 숨진 보니파스 대위를 기리기 위해 붙여진 캠프 보니파스에 본부를 둔 JSA대대가 담당했다. 북한군과 마주보는 관계로 한국병사가 필요해(미군 6명, 한국군 4명 비율) 카투사(미군 배속 한국군)나 훈련소에서 특별 선발해 투입했다.

우리 군을 대표하는 병사이기에 JSA근무병은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를 갖춰야 했다. 성인남성 평균신장이 168cm안팎이던 1980년대에도 180cm 이상 되는 사람 중에서 선발해 갔다. 
2011년 3월 JSA 경비대대 장병을 격려하고 있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 185cm의 오바마 대통령보다 우리 JSA경비대대 병사가 더 훤칠하다. 국가기록원

JSA근무병은 △ 비상시 즉각 북한군과 맞서야 하고 △ 부동자세로 경비를 서야하고 △ 같은 부대 미군에게 얕보이지 말아야 하기에 훈련도, 군기도 엄격했다.

의장대, 헌병대, 특전사를 모두 합친 듯한, 군의 대표적 3D보직 중 하나로 ‘제발 뽑히지 말았음’하고 빌고 빌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카투사를 단속할 수 있는 한국헌병들도 JSA부대원만큼은 피해갔다. 물론 '폼난다'며 가길 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2004년 JSA경비 한국군으로...이제 비무장 병사가, 관광코스될 듯

한미간 '군사임무전환에 대한 이행계획'에 따라 2004년 11월 1일 0시부로 JSA 경비임무가 완전히 한국군으로 넘어왔다.

JSA가 유엔군 산하에 있기에 병사 비율은 한국군 93대 미군 7이다 . 경비를 우리군이 맡은 뒤에도 JSA근무병은 여전히 키크고 체격이 좋은 '훈남'으로 구성돼 있다. 

남북과 유엔군사령부는 마침내 25일 JSA 구역 내 초소(남 4곳, 북 5곳)와 화력장비 및 탄약을 모두 철수했다. 소총·권총 등도 JSA 밖으로 반출했고 JSA 내 경비근무는 남북이 각각 35명(장교 5명, 병사 30명)이 비무장으로 수행한다.

JSA내 남북 경비병력은 군사분계선(MDL)에 관계없이 왕래하고 국내외 관광객 등 민간인들도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JSA 남북한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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