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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끄지처럼 죽거나 사라지거나"…절대 권력의 '눈엣가시' 제거하기

입력 : 2018-10-24 07:00:00 수정 : 2018-10-24 09: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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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토리 뉴스] 각국 절대 권력의 정적 제거사 지금 미국의 관심사는 북한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쏠려 있다. 북한 비핵화도 중요하지만 사우디 정권의 안정성 여부도 그 못지 않게 미국 국가이익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국에 거주하면서 사사건건 사우디 왕가에 비판적인 기사를 써온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지난 2일 이혼 확인서류를 받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실종된 일을 놓고 미국, 유럽, 사우디, 터키 등이 엇갈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우디 왕실이 그를 암살, 시신을 훼손했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지만 모른척 했던 사우디도 국제사회 제재 위기에 처하자 '우발적 충돌로 주먹다짐끝에 숨졌다'며 사망 사실만은 인정했다. 
지난 2일 카슈끄지가 서류를 받기 위해 터키 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담긴 CCTV. 사진=AP 뉴시스

카슈끄지의 예는 절대왕정, 독재권력에서 이따금 자행해 왔던 '눈엣 가시' 제거하기 또는 '정적' 지우기의 대표적 수법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대중을 앞세운 비판 후 제거

옛 소련, 중국은 공산당 1당 지배체제다. 당이 절대적 존재로 권력자나 권력을 노리는 자 모두 당심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당심을 이용해 왔다. 
러시아 혁명 주역들인 스탈린, 레닌, 트로츠키(왼쪽부터)

레닌 뒤를 이어 1922년 소련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한 때 혁명의 3대 동지(레닌-스탈린-트로츠키)였던 트로츠키를 1927년 제거했다. 소비에트 독재(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스탈린은 유럽혁명을 지원하는 등 국제 사회주의가 더 중요하다라는 트로츠키를 반당주의자로 몰아 쫓아냈다. 트로츠키는 외국을 떠돌다가 1940년에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1960년대 중국 권력서열 1,2위에 자리했던 마오쩌둥과 린뱌오(왼쪽부터)

중국의 마오쩌둥은 권력 공고화를 위해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린뱌오의 세력이 커질 기미를 보이자 그 측근들을 1969년 9차 당대회와 9기 2중전회를 통해 비판, 린뱌오를 코너로 몰아 세웠다. 위기를 느낀 린뱌오는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탈출하다가 비행기 추락사로 숨졌다.

◆암살 또는 독극물 사용...‘푸틴식 지우기?’

‘현대의 짜르’로 불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절대왕정에 버금가는 권력을 구축했다. 이런 그에게도 성가신 존재들이 몇 있다. 인기있는 야권 지도자, 외국에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다.
반푸틴 운동에 나선 넴초프의 모습. 사진=TV조선 캡처
묘하게 푸틴에게 대들었던 이들은 암살당하거나 독극물로 의심되는 공격을 받고 숨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2015년 2월 27일 일어난 보리스 넴초프(55) 전 총리의 피격이다.

그해 3월1일 푸틴 대통령에 항의하는 대규모 정부 반대 집회를 열 계획이던 넴초프는 27일 밤 11시40분쯤 모스크바 시내 중앙광장에서 총탄 4발을 맞고 쓰러졌다.

러시아 내무부는 "넴초프 전 총리가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과 크렘린궁 남쪽에 있는 모스크바강 인근을 지나가다가 차량에서 발사된 총에 맞아 숨졌다"며 범인으로 체체공화국 보안군 출신 5명을 검거해 징역형에 처했다.

이에 대해 유가족과 야권은 푸틴에게 충성하는 람잔 카디로프 체첸공화국 대통령이 살해를 지시한 것으로 암살 배후는 푸틴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넴초프는 1997년 보리스 엘친 대통령에 의해 제1부총리에 오르는 등 '옐친 후계자'로 각광 받았다. 푸틴이 정권을 잡자 야권 지도자로 변신,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푸틴에 비판적 기사를 써왔던 노바야 가제트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안나 폴리트콥스카야가 2006년 10월 모스크바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진 일, 2006년 11월 런던 호텔바에서 러시아 정보요원과 홍차를 마신 뒤 쓰러져 숨진 전 KG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등의 일도 푸틴식 지우기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잇단 교통사고 사망...“북한식 정적 제거?”

북한 정권을 수립한 김일성 주석도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통해 연안파(중국)의 중심 김두봉을 자리에서 내쫓기도 했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학회의 핵심 멤버이자 항일 운동가로 명성이 높았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연석회의 때 김구·김규식·김일성과 함께 4자회담을 가졌을 만큼 북한정권 초기 핵심 인물이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정전협정 북한측 대표였던 남일.

북한에서 몇몇 요인들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탈북민 등은 이에 대해 차량통행이 뜸한 북한에서, 그것도 요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면 대부분 기획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교통사고로 숨진 대표적 인물은 남일.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 있었던 정전 협정식에서 북한 대표로 나와 서명했던 남일은 1976년 2월 신안주 화학 공장에서 평양으로 향하던 중 국가정치보위부의 번호판을 단 6t짜리 대형트럭에 들이받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인민군 총참모장에서 물러나 정무원 부총리로 있던 남일 죽음 뒤에는 후계체제에 걸림돌을 없애려했던 김정일 위원장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2015년 12월 29일 대남정책을 총괄했던 김양건 노동당 비서의 교통사고 사망, 2010년 6월 리제강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의 교통사고사 등에 대해 권력투쟁에 따른 결과라는 말이 탈북자 사회 등에서 나돌았다.

◆정적 제거의 새 무기는 ‘부패’와 ‘가짜뉴스’

최근 사회주의 국가 등에서 정적제거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부패이다. 2013년 처형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고모부 장성택 몰락도 '부패'가 주된 이유였다.

부패를 가장 잘 이용하는 이는 시진핑 중국 주석으로 꼽힌다. 정적은 물론이고 판빙빙 등 연예계, 부자 등을 가리지 않고 부패로 몰아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는 지적이다. 인민이 가장 중요한 말인만큼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부패는 그 누구도 방어할 수 없는 절대악이라는 점을 시진핑은 너무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도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가시들’이 있게 마련이다. 가시를 강제로 뽑을 수 없기에 소문, 가짜뉴스를 적절히 배합해 스스로 떠나도록 만드는 예가 많아지고 있다. 정치권이 SNS에 매달리는 이유도 알고보면 라이벌 제거 혹은 라이벌 힘을 빼려는 의도에서다.

◆박정희 시대의 ‘김대중 납치 사건’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0~1990년대까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도 자칫하면 카슈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을 뻔했다. 

1973년 8월8일 오후 1시쯤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실 부근. 투숙 중이던 김 대중은 괴한들에게 납치된 뒤 부산을 거쳐 129시간만인 8월13일 저녁 10시 30분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부근에서 풀려났다.

DJ가 살아난 것은 CIA서울지부가 중앙정보부 무전을 도청, 'DJ 납치'를 파악한 후 한국 정부에 경고한 때문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박정희-이후락-중앙정보부 라인이 저지른 일로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물론 미국의 중재로 한일 양국 모두 사건을 덮어버리면서 아직껏 정확한 실체는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다만 김형욱 전 중앙정부부장이 1977년 6월 미국 청문회에서 'DJ 납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총지휘자가 돼 실행한 것으로 박정희의 재가 없이 이루어질 성질의 사건이 아니다'고 증언, 사건 윤곽을 어느 정도 제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이후락의 지시 아래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여기서도 박정희 직접 관련성은 증명하지 못했다.

◆박정희 말년 ‘김형욱 실종사건’

박정희 시대의 또다른 초상화는 1979년 10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사건이다.
김형욱과 박정희

김형욱은 5·16쿠데타 주축인 육사 8기로 5·16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을 거쳐 1963년부터 1969년까지 중앙정보부장을 맡는 등 박정희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 뒤 유정회 의원 명단에서 빠지는 등 권력에서 멀어지고 신변에 불안감을 느끼자 1973년 4월 미국으로 망명, 반체제 운동에 앞장섰다.

김형욱은 1979년 10월1일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7일 뒤 행방불명됐다. 1984년 10월 8일 사망신고가 됐으며 1990년 서울지방법원이 사망선고를 내렸다.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중정연수생들이 제3국인을 매수해 권총으로 김형욱을 살해했다'고 잠정결론을 내렸지만 미국에서 김형욱과 가까이 지냈던 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은 김재규가 아닌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 등 다른 이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봤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시 혹은 묵인했다는 물증이 없어 김형욱 실종사건의 정확한 실체와 어느 선까지 관련됐는지는 미궁에 빠져 있는 상태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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