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꽃집의 국화향은 은은하고 저녁 퇴근길 골목의 어둠은 다감하다.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을 마시며 가을 달을 올려다보기에도 좋은 날들이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을 꺼내 한 편의 시를 읽기에도 좋은 날들이다.
안현미 시인 |
생각해보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빨리 퇴원을 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싫고 더러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주민등록증을 1년 내내 들고 다니던 지갑 속에서 발견하고 침대 옆 서랍 속에 둔 줄도 모르고 그 비싼 휴대전화를 새로 산 바보 멍청이. 그런 정신머리로 시를 쓰고 밥을 하고 일을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다녔던 문창과의 구호는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염원이 담긴 ‘획을 긋는 문예창작학과’였다. 이런 정신머리로 살아선 획을 긋기는커녕 점 하나라도 그릴 수나 있을지 반성하게 된다. 문학개론 시간에 모 교수께서 말씀하셨다. “획을 긋는 게 아니라 각을 뜨는 문예창작학과쯤은 돼야지. 문학은 그런 각오로 하는 거다”라고. 어디 문학뿐이랴. 그림을 그리는 일도 음악을 하는 일도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일도 폐쇄병동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다 그런 각오로 해야 하는 일들일 것이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정신 바짝 차리고 각을 뜨겠다는 그런 각오로 살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각오로 시를 쓰고 시를 살며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라던 한 시인이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났다. 힘없고 병든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제 몸처럼 안고 보듬고 앓으며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안녕. 굿바이 가능하다면 시유 어게인(See you again).
생각해보라고 하면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개론서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다. 산 사람은 살아 있어서 눈물겹고 죽은 사람은 죽어서 눈물겹다. 하루 종일 서류를 들여다보고 한 달 내내 뭐라고 지껄였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투약하듯 겨우 시 한 편 읽으며 안정을 구해보는 가을이다. 골목의 어둠은 다감하고 국화 화분이 놓인 가을밤 창문은 환하다.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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