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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생각 그 후의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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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12 22:32:27 수정 : 2018-10-12 22: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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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아 생각하길 버린 사람들/치열한 사고와 담 쌓은 군상들/개론書도 내비도 없는 인생길/시 한편 읽으며 상념에 잠겨볼까 1년 내내 들고 다니던 지갑 속에서 작년에 분실한 주민등록증을 발견하는 사람. 아침에 깨어보니 보이지 않는 휴대전화를 찾아 전날 퇴근하던 길을 되짚으며 편의점과 빵집과 버스정류장으로 돌아다니며 찾다 찾다가 못 찾고 분실 신고를 하는 사람. 어쩔 수 없이 비싼 돈을 치르고 새로 개통했는데 한 달 후 수면 안대를 찾으려고 침대 옆 서랍을 열다 그 속에서 분실한 휴대전화를 발견하고 황당해하는 사람. 왜 나는 그런 사람인가? 생각해보라고 하면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한 번 생각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려워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 아니 생각할 틈조차 없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드는 걸 보니 가을이 깊어 가는가 보다. 국화 화분을 사고 싶고 생각이 많아지는 걸 보니.

아침 출근길 꽃집의 국화향은 은은하고 저녁 퇴근길 골목의 어둠은 다감하다. 따뜻한 국화차 한 잔을 마시며 가을 달을 올려다보기에도 좋은 날들이지만 책장에 꽂혀 있는 시집을 꺼내 한 편의 시를 읽기에도 좋은 날들이다.

안현미 시인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으나 폐쇄병동 안정실에 갇혀 있는 최경서씨는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중얼거리기만 하는 사람이다. 똥오줌도 옷에다 그냥 싸고 투약 시간에 약을 먹일 땐 아무리 안 묻히려고 애를 써도 질질 흘린 더러운 타액을 묻히고 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루빨리 퇴원을 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했으면 좋겠다는 더러운, 냄새나는, 하염없이 침 흘리고 오줌을 싸는 골칫덩어리이다. 약의 함량을 조절하기 위해 환자들의 몸무게를 재는 날은 더 곤혹스럽다. 싫고 더러워 빨리 퇴원을 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했으면 좋겠다는 최경서씨를 한 몸처럼 안고 보듬고 낑낑대며 저울 위에 직접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더럽고 냄새나는 최경서씨를 끌어안고 한 몸처럼 저울에 올라가 낑낑거리며 잰 무게에서 내 몸무게를 빼는 것. 그것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한 평 반 좁은 폐쇄병동 안정실에 살고 있는 최경서씨의 ‘몸무게를 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빨리 퇴원을 하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싫고 더러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줄 알았던 주민등록증을 1년 내내 들고 다니던 지갑 속에서 발견하고 침대 옆 서랍 속에 둔 줄도 모르고 그 비싼 휴대전화를 새로 산 바보 멍청이. 그런 정신머리로 시를 쓰고 밥을 하고 일을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다녔던 문창과의 구호는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훌륭한 작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염원이 담긴 ‘획을 긋는 문예창작학과’였다. 이런 정신머리로 살아선 획을 긋기는커녕 점 하나라도 그릴 수나 있을지 반성하게 된다. 문학개론 시간에 모 교수께서 말씀하셨다. “획을 긋는 게 아니라 각을 뜨는 문예창작학과쯤은 돼야지. 문학은 그런 각오로 하는 거다”라고. 어디 문학뿐이랴. 그림을 그리는 일도 음악을 하는 일도 컴퓨터로 프로그램을 짜는 일도 폐쇄병동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도 다 그런 각오로 해야 하는 일들일 것이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정신 바짝 차리고 각을 뜨겠다는 그런 각오로 살아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각오로 시를 쓰고 시를 살며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라던 한 시인이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났다. 힘없고 병든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을 제 몸처럼 안고 보듬고 앓으며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안녕. 굿바이 가능하다면 시유 어게인(See you again).

생각해보라고 하면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생각해보면 개론서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흘러가는 인생이다. 산 사람은 살아 있어서 눈물겹고 죽은 사람은 죽어서 눈물겹다. 하루 종일 서류를 들여다보고 한 달 내내 뭐라고 지껄였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투약하듯 겨우 시 한 편 읽으며 안정을 구해보는 가을이다. 골목의 어둠은 다감하고 국화 화분이 놓인 가을밤 창문은 환하다.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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