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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세기의 거짓말과 참말의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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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10-08 21:48:50 수정 : 2018-10-08 21: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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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비핵화 둘러싼 담론들/위선·기만 항상 경계해야/민족적 현실 직시 못하면/구한말 같은 상황 되풀이 작금의 남북관계를 두고 필자는 ‘종북사대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2017년 2월 14일자 ‘청심청담’). 이것은 아마도 한국인만이 간파할 수 있는 개념 규정일 것이다. 체제경쟁 중인 남북한 사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사대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 국민소득 3만달러의 대한민국과 세계 최빈국, 국민소득 2000달러 수준의 북한을 경제통계학적으로 보면 분명히 전자가 대국이고, 후자가 소국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사상적으로는 역전되었으니 참으로 희화적이다. 북한의 핵보유로 인한 남북의 비대칭전력과 주체사상의 위력이 작용했을 것이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경제대국이 된 대한민국에 언제부터인가 실재론보다는 망국의 명분론이 득세하고, ‘헬 조선’과 같은 자기부정의 선전문구가 적반하장식으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명분론세력은 민주주의를 앞세우면서 당파(정파)싸움을 일삼고, 상대를 적폐세력이라고 규정하는 데에 서슴지 않고 있다. 이들 적폐세력에 재벌과 기업인이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좌파지식인과 고시와 공무원시험에 목을 매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일제식민지를 불러온 조선조의 사대·관료주의의 비생산적 병폐를 빼닮았다.

최근의 명분론은 성리학과 사회주의의 융합으로서 ‘좌파성리학’으로 명명할 만하다. 19세기의 계급투쟁과 성리학의 잘못된 만남에 기인하는 좌파지식인이야말로 좌파·보수라고 하는 편이 옳다. 좌파·보수의 결정판이 바로 종북사대주의이다. 만약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로 연결되는 대륙의 사회주의연대 속으로 대한민국이 들어간다면 해양국가로서의 반세기 경제발전과 영광은 퇴색할 게 분명하다.

‘사(士)’계급은 전통적으로 사회의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을 결정짓는 위치에 있어 왔다. 특히 좌파·‘사’계급은 중국·북한 사대주의를 재현하는 행태와 함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보수정권 탓으로 돌리면서 국익과 관련된 문제를 이념적 잣대로 처리함으로써 불안을 일상화하고 있다.

우리는 1960년대부터 민주·민족·민중 이데올로기의 혼란 속에 살아왔다. 반성적 성찰이 부족한 우리는 외래이데올로기의 종속과 함께 6·25라는 대리전을 치르고도 당쟁적 정치구조로 인해 스스로의 신화를 훼손함으로써 국가신화창조에 실패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은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주장하고부터이다.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을 ‘임시’가 아닌 ‘정상적(헌법적) 정부’로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과 정부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했다. 김영삼 정권은 종래정권의 부당성을 공공연히 역설하는 것과 함께 ‘문민정부’를 내세움으로써 법통의 공백을 초래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탄생을 부정하는 ‘국가적 원죄’에 속한다.

문민정부는 민주화의 공적에도 불구하고, 근대판 ‘문무(文武)당쟁’과 ‘국가분열’의 원조가 됐다. 소급입법을 통해 역사를 역류시켰으며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만들었다. 이는 ‘현대판 사문난적과 당쟁’의 출발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민주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민중으로 중심이동을 하는 변곡점을 제공했다.

지식인과 민주주의자의 상당수가 좌파적 성향을 띠는 이유는 ‘위선적·사대적 선비문화’에 기인한다. 좌·우파 지식인의 공통점은 진정으로 국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업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재산과 명예가 낮은 화이트칼라들은 기업인을 질투하면서도 지식의 허영과 기만에 빠져 있다. 이런 정신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낙오하게 될 것이다.

북한 비핵화를 위해 유엔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북 경제제재 조치의 경계망을 뚫고 재계 총수들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 공식수행원으로 참가했다. 미국과 유엔의 대북제재를 감안하면 ‘위험한 행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과 기업 위에 군림하는 관료들의 위세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왕조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각종 재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재벌 총수의 방북행렬에서 사(士)계급의 독단과 폭주를 볼 수 있다. 세계는 상공농사(商工農士)가 된 지 오래인데 아직도 명분론·비생산을 정의·진보로 착각하는 선비의 망령이 부활한 것인가. 선진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한 선비들은 자칫하면 사대주의와 독단론에 빠지기 쉽다.

지난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 국제사회의 공조와 승인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갈등과 불화의 소지를 안고 있는 사항이다. 실질적인 북한 비핵화의 진전 없이 앞서간 군사 및 각종 평화 합의들은 평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지만 동시에 예측불허의 국내외적인 돌발변수로 인해 불안을 자아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종전선언에 대해 ‘시간싸움(time-game)’을 안 하겠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사했지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방한으로 제2차 북·미회담이 조기에 개최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비핵화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남북·한미·북미회담이 ‘세기의 거짓말’이 될지, ‘세기의 참말’이 될지 미지수이지만 민족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구한말과 같은 내우외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통일과 평화에 앞서 우리는 위선과 기만과 궤변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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