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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출소 후 행방묘연… 승소해도 보상받을 길 '막막' [범죄, 처벌만이 끝 아니다]

입력 : 2018-10-07 18:55:13 수정 : 2018-10-07 23: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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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경남 창원의 한 요양병원에서 만난 류모(67·여)씨는 휠체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억울하다” 같은 짧은 말만 여러 번 반복했다.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일종의 치매 증상이다. 류씨가 이렇게 된 건 약 7년 전 일면식도 없던 20대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나서다.
지난달 12일 경남 창원의 한 요양병원에서 2011년 마산 ‘묻지마’ 폭행사건 피해자 류모씨(오른쪽)가 김종식 마산·함안·의령범죄피해자지원센터 사무처장과 상담하고 있다.
마산·함안·의령범죄피해자지원센터 제공

◆‘묻지마 폭행’으로 딸이 돼 버린 아내… 70세 남편이 간병

2011년 11월27일 오전 9시쯤 당시 무직이던 유모(34)씨는 길 가던 류씨를 잡아 넘어뜨린 뒤 욕을 퍼부으면서 얼굴, 가슴 등을 발로 수차례 밟고 찼다. 이유는 없었다. 유씨는 3시간 전쯤 근처 노래방에서 다른 피해자를 폭행하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이 사건으로 류씨는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식사나 용변 등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렸다. 뇌병변 2급 장애 판정을 받고 7년 내내 병원에서만 지냈다.

남편 박모(70)씨는 “아내가 원래는 멀쩡했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현 상태가 ‘기적’과도 같다고 했다. 류씨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가 입원 두 달 만에 극적으로 깨어났다. 류씨가 말을 하게 된 것도 이제 3개월이 조금 넘었다. 걷기는커녕 스스로 일어서지도 못하지만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미는가 하면 밥을 두세 숟갈 떠먹을 정도로 많이 호전됐다. 치매약, 혈압약 등 약물을 복용하며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박씨는 아내 수발을 하느라 경비 일을 그만둬 수입이 끊겼다. “나이가 일흔이 넘으니 경비 일을 다시 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조선업체에 다니는 아들이 매달 병원비 50만원을 내는데 불경기 탓에 아들 사정도 넉넉지 않다.

박씨는 지금은 간병인을 쓰고 노인 일자리 사업에 꼬박꼬박 참가한다. 그렇게 수중에 쥐는 돈은 한 달 27만원. 여기에 기초연금과 아내 장애수당 등을 더해 병 수발을 한다.

결국 박씨는 유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해 1심에서 1억여원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 돈을 받아낼 길이 요원하다. 징역 5년 실형이 확정된 유씨가 최근 출소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행방조차 알 수 없다.

◆종로 여관 방화사건 그 후… “40년간 해온 재봉사 일 그만둬”

“그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담배 없이 살 수가 없어요 ….”

지난 1월20일 오전 3시6분. 서울 종로구의 한 여관 화재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최모(53)씨는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성매매 여성을 불러 달라’는 요구를 여관 주인이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가 난 60대 남성이 저지른 방화였다. 불은 삽시간에 여관을 집어삼켜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최씨는 2층에서 뛰어내려 화를 면했지만 발을 크게 다쳐 서 있기도 어렵다. 40년간 해온 재봉사 일도 그만뒀다.

“양쪽 발이 부러져 철심을 오른쪽에 3개, 왼쪽에 2개 박았어요. 척추도 휘어지는 바람에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통증 때문에 매일 밤 30분에 한 번씩 잠에서 깨고…. 잊으려고 해도 자꾸 사건 기억이 떠올라요.”

최씨는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부모는 그가 세 살배기 적에 갈라섰다. 생모 얼굴은커녕 이름도, 성도 모른 채 지천명을 넘겼다. 그는 ‘엄마’라는 단어에 그리움이 사무친 채 유년 시절부터 지금껏 종로와 청계천 일대 재봉공장에서 일명 ‘시다’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느닷없는 사고로 더 이상 정든 재봉틀 앞에 서서 페달을 밟지 못하게 됐다.

방화범을 향한 원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처음 입원했을 때는 그 사람 얼굴을 한번 보고 싶었어요.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보호대를 차고서라도 방화범 재판을 보러 가고 싶었어요.”

검찰은 방화범에게 1·2심에서 모두 사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한국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는 사고 직후 최씨 수술비 등을 지원하고 장해구조금 지원 대상자로 선정해 향후에도 지속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최씨는 병원비 걱정을 덜었다. 몸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여관방을 새로 얻어 장기투숙 중인 그는 내년 1월 철심 제거 수술을 앞두고 재활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이전의 삶을 되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최씨는 ‘방화범이 용서를 구한다면 받아주겠냐’는 질문에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마음이 아프죠. 저로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죠. 선처해달라고도 못하겠고….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실수가 마음이 아픈 거죠. 나랑 나이가 비슷하던데….”

◆가해자는 중국 도피, 피해자는 직장 권고사직 ‘생계 막막’

2006년 10월4일 오전 9시 박모(62·여)씨는 평소와 같이 서울 청담동 사무실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본 박씨의 얼굴에 날아온 것은 다름아닌 기름이었다. 가해자 손모씨는 그대로 기름에 불을 놓고 달아났다. 박씨는 사건 직후 두 달간 입원했다. 얼굴과 상반신에 피부이식 수술을 받았다. 코 절반이 녹아내려 재건 수술을 받았다. 귀는 사라졌다. 화상으로 땀구멍이 막혀 면역체계가 나빠졌다. 땀을 배출하지 못하니 여름만 되면 체온 조절이 어려워 호흡곤란 증상이 일어났다. 겨울이 되면 이식된 피부가 당겨 입이 제대로 벌어지지 않아 음식을 씹기 어려워졌다.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면서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얼굴에 화상 흉터가 남아 사람을 접하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치료비 대부분을 스스로 부담했다. 국가에서 범죄피해자 지원금으로 받은 돈은 총 760만원 정도였다. 그마저도 사건 후 5년이 지나자 끊겼다. 법무부 내부 지침상 5년 지원이 최대치이기 때문이다. 박씨는 치료비를 벌기 위해 도시락 업체, 편지봉투 제조공장을 전전하며 계속 일을 하고 있다. 박씨의 화상은 장기적 치료가 필요하다. 게다가 비급여 치료가 많아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가해자 손씨에 관해 들은 소식은 중국으로 달아났다는 것이 전부다. “그냥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라고 박씨는 울먹였다. 박씨는 아직도 ‘그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박진영·배민영·김범수 기자 jy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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