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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의 인물춘추⑧] "취하지 않곤 돌아갈 수 없구나"…허수경이 남긴 '문장들'

입력 : 2018-10-05 07:00:00 수정 : 2018-11-10 08: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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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허수경 시인 이야기

1992년 독일로 건너간 뒤 26년간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내면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 허수경씨가 지난 3일 별세했다. 향년 54세.

시인의 작품을 편집·출간한 출판사 ‘난다’의 김민정 대표는 4일 “허 시인이 한국 시간으로 어제(3일) 저녁 7시50분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허수경은 이역만리 독일에서 숨쉬고 사유하며 글을 써내려갔지만, 많은 한국인 독자들은 허수경의 문장을 눈으로 읽고 손으로 필사해 가슴에 담곤 했다.

문학평론가 정끝별은 이와 관련, 논문 <古老를 좆는 마음의 역사-허수경론>에서 “허수경의 시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라면서 “그의 시의 뿌리는 언어에 대한 엄격성에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허수경의 어떤 문장이, 시가 독자들의 가슴에 파고들었을까.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기자의 가슴에 박힌 허수경의 시와 문장을 정리해본다.

◆실천문학으로 등단…“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은 경상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상경해 방송국 스크립터 등으로 일하다가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을 비롯해 4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데뷔작 <땡볕>을 소리내 감상해보자.

소나무는 제 사투리로 말하고
콩밭 콩꽃 제 사투리로 흔드는 대궁이
김 매는 울 엄니 무슨 사투리로 일하나
김 매는 울 올케 사투리로 몸을 터는 흙덩이

울 엄니 지고 가는 소쿠리에
출렁 출렁 사투리 넌출
울 올케 사투리 정갈함이란
갈천 조약돌 이빨 같아야
-<땡볕>

◆24세에 첫 시집…“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허수경은 데뷔작을 비롯해 시들을 모아 1988년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실천문학)를 펴냈다. 그의 나이 만 24세. 첫 시 <진주 저물녘>에선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듯한, 세상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여성을 만날 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이사 천년 같제 날이 저물세라 강바람 눈에 그리매 지며 귓불 불콰하게 망경산 오르면 잇몸 드러내고 휘모리로 감겨가는 물결아 지겹도록 정이 든 고향 찾아올 이 없는 고향
문디 같아 반푼 같아서 기다림으로 너른 강에 불씨 재우는 남녘 가시나 주막이라도 차릴거나
승냥이와 싸우다 온 이녁들 살붙이보다 헌출한 이녁들 거두어나지고
밤꽃처럼 후두둑 피어나지고
-<진주 저물녘>

표제가 된 시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는 어떤가. 슬픔이야말로 인생의, 삶의 거름이라는 말은 나이, 세월의 비밀을 알아버린 자의 것이다.

내일은 탈상
오늘은 고추모를 옮긴다.

홀아비 꽃대 우거진 산기슭에서
바람이 내려와
어린 모를 흔들때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남녘땅 고추밭
햇빛에 몸을 말릴 적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
붉은 고추가 익는다

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
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
아랫도리 서로 묶으며
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폐병쟁이 내 사내>
<폐병쟁이 내 사내>도 많은 이들의 가슴, 심장을 울리기도 했을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시는 그녀의 실존적인 그 무엇이 투영됐던 것일까.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 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 주고 싶었네

산 가시내 되어 독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내 할미 어미가 대처에서 돌아온 지친 남정들 머리맡 지킬 때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 것처럼
어디 내 사내뿐이랴
-<폐병쟁이 내 사내>

기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언제나 별로 할 말이 없다”고 밝힌 허수경은 시집의 에필로그 격인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행복했다고. 행복하다는 말이 오히려 슬프다.
“앞으로 고통이 있다면 나의 몫이요 그 고통으로 빛나는 날이 예비된다면 이 땅에 내가 노래해야 할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의 몫이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므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다.“

◆<혼자 가는 먼 집>에선 “킥킥거리며 불러보는 당신”
허수경은 1992년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을 냈다. 먼저 표제시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어야 한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갈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 가는 먼 집>

◆취하지 않고선 돌아가지 못하리…<不醉不歸>
특히 이 시집에 담긴 <不醉不歸(불취불귀)>는 인상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고통과 잊지 못하는 괴로움을 비옥한 언어로 노래해서다. ‘불취불귀’이란 말 뜻은 아마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는 정도 될 터다.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 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夢生醉死)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불취불귀 不醉不歸>

◆“병마저 정들다니, 아프지 말라”…<정든 병>
시 <정든 병>은 또 어떤가. 시를 곧이곧대로 이해한다면 병이 정이 들 정도로 병이 깊어졌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시인 곽재구는 이 시를 좋은 시로 꼽으며 시인더러 아프지 말라 했다.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
가엾은 등불 마음의 살들은 저리도 여려 나 그 살을 세상의 접면에 대고 몸이 상합니다
몸이 상할 때 마음은 저 혼자 버려지고 버려진 마음이 너무 많아 이 세상 모든 길들은 위독합니다 위독한 길을 따라 속수무책의 몸이여 버려진 마음들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아프고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이 켜놓은 세상의 등불은 어둑어둑 대책없습니다
-<정든 병>

◆1992년 돌연한 독일행…“시심 더 간절”
허수경은 1992년 시집을 내고 돌연 독일로 건너갔다. 그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선사고고학을 공부한 뒤 뮌스터대학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편을 지도교수로 만나 결혼했다.
그는 독일에서도 시를 썼고, 2001년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창작과비평사)을 펴냈다. 시 <꿈, 불>는 20대 초반의 슬픈 경험이 슬그머니 흘러나온 듯하다.

어느 해, 이 세상의 봄이었다 나는 스물이 갓 지났고 배가 자주 고팠습니다 산천 경계에서 온 친구들은 길거리에서 자주 죽었습니다 불을 밟고 가는 기차를 보면 푸른 새우살 속으로 칼 같은 혀를 들이밀고 싶었습니다
-<꿈, 불>

허수경은 8년 만에 시집을 묶어내면서 8년이라는 그 시간이 시를 쓰고 싶어하는 마음만이 간절한 세월이었다고 되돌아본다.
“...몸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으로 나는 다양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낯선 종교와 정치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나라는 한사람이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한국인이라는 나와 나라는 나, 그 사이에 섬처럼 떠돌아다니던 시간들. 그러나 시를 쓰는 나는 한국어라는 바다에서만 머물고 있었다.”(109쪽)

◆“주머니 속 폭탄 아이들 공중에서 흩어졌다”
허수경은 다시 4년 만에 2005년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을 묶어 냈다. 그는 반전(反戰)을 노래했다. 다음의 시를 소리내 읽어보라.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낯선 이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퍼런 큰 새를 타고 다니는 동안, 아이들은 폭탄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나귀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기름이 솟아났다, 검은 기름 속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진 사람들이 끈적거리면서 나타나 오래전에 헐린 집에 대해서 물었다, 그때마다, 그 강변에 꽃이 피었다, 붉거나 흰 꽃들이었다, 바람이 불면 꽃이 지고, 꽃 진 자리에서 열매가 돋아났다, 돋아난 열매는 우는 여자의 눈동자 모양을 하고 있다, 열매를 먹으면 갑자기 마음속에 쟁여둔 슬픔으로 가는 마음이 사라졌다, 자지러지게 웃고 싶어서 강변으로 나가서 그렇게 웃었다, 아이들의 주머니 속에 든 폭탄이 터져 아이들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우는 여자의 눈동자 같은 열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웃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에 차오르는 눈물”
허수경은 2011년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을 펴냈다.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를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나비를 보았네

나비가 날아가는 곳을 멍하니 보는데
턱 허니 의젓하게 차오르는 눈물

언제부터인가
야간등을 단 밤하늘의 비행기를 보면
무슨 이 지상에서 살아남을 권리이듯
눈물이 의젓하게 차올랐네

저 안에 마늘쪽같이 아린 집이 있어
야간등을 달고 나비들은 그 곁을 지나는지도 모른다

나비가 저녁 햇살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잠자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네

여린 빛마저
울음 오므리듯 투과하는 날개를 가져서
어떡할 것인가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눈>에서 “얼마나 오래 걸어야 시인될까”
허수경은 2016년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을 묶어 냈다. 그의 마지막 시집. 그는 시 <눈>에서 눈 앞에서 문장을, 시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의 편린을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눈>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 그대들도 그러하다”
허수경은, 독일에서 고독했을 것이다. 그는 시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에서 고독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즉 고독이란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오래된 것이라고.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중에서

허수경은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2003, 문학동네) 『모래도시를 찾아서』(2005, 현대문학) 『너 없이 걸었다』(2015, 난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2018, 난다) 등을 펴냈다. 그는 이 외에도 장편소설 『박하』(2011, 문학동네) 『아틀란티스야, 잘 가』(2011, 문학동네) 『모래도시』(1996, 문학동네) 등을 펴냈다.

◆위암 투명 “사납게 주름 잡힌 상판하지 말길”
특히 허수경은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지난 2월 김 대표에게 알린 뒤 자신의 작품을 정리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올해 산문집이 바로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난다)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잘 살아야 되겠니? 내가 나에게 말을 건다. 무엇 때문에 사납게 주름 잡힌 상판을 들고 그렇게 잘 살아야 하겠니? 이치를 따져가며, 잘잘못을 들어가며…”(239쪽)

오랜 고독과 병마 속에서 터득한 눈이 청명하다. 돈과 권력, 명예 등으로 찌든 우리를,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우리는 어떠한가.

◆“슬픔이 문학의 모퉁이”…슬픔 피하지 말지니
허수경은 등단 이래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과 2016년 제6회 ‘전숙희문학상’, 올해 제15회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론 독일에서 지도교수로 만나 결혼한 남편이 있다.
적지 않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허수경의 시는, 문학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의 문장은 어느 피부에서 뚫고 솟아난 것일까. 산문집 『그대는 말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는 본 작은 단서 하나.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웠다. 나는 그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천정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었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 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309쪽)

‘천정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었다’는 허수경의 말이 진리라면, 글을 쓰려운 우리들은 오늘 어디에서 무엇으로 슬프고 외로워야 하는 것일까. 이 도저한 슬픔과 외로움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가.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ps. 독자분들의 감수성은 저와 많이 다를 것입니다. 혹시 더 많은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허수경 시인의 글이, 문장이 있다면 댓글 등에 적어 알려주십시오. 함께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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