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도굴된 15세기 '묘지' 500만엔에 日 밀반출… 2017년 다시 귀향 [해외 우리 문화재 바로알기]

입력 : 2018-10-02 10:00:00 수정 : 2018-10-01 21:26:28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8〉 이선제 묘지의 국내 귀환/조선왕조실록 편찬 참여한 대학자/생전의 수많은 업적 묘지에 기록돼/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새겨 놔/1998년 檢 수사로 도굴 사실 알아
1998년 9월 초 서울중앙지검은 문화재 밀매단을 검거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국을 거쳐 북한 문화재를 밀수입해 불법유통하려 한 일당을 붙잡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선제 묘지’(墓誌: 죽은 사람의 생애를 평평한 돌이나 도자기에 새겨 넣어 무덤에 함께 매장한 기록물)는 밀매단이 유통시킨 유물 중의 하나였다. 검거 직전에 묘지를 일본으로 빼돌린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던 묘지는 그로부터 16년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난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묘지 주인인 필문 이선제(?門 李先齊·1390∼1453)는 세종대 정치인이자 학자다. 고위직을 두루 거쳤고, 조선왕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조선 전기 호남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의 무덤 속에 있던 묘지가 어쩌다 문화재 밀매단의 손을 타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떻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을까. 묘지 성격, 이선제 생애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이선제 묘지 조선전기 학자이자 관료인 이선제의 생애를 적어 무덤에 묻었던 묘지. 15세기 묘지 제작의 경향과 배경을 잘 보여주고 있어 도자사 연구에 매우 귀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아 보물 제1993호로 지정됐다.
◆도굴당한 이선제 묘지, 유랑의 시작

중국에서 유래해 삼국시대 이후 지배층에서 폭넓게 사용된 묘지에는 망자의 생전 행적이 기록된다.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묘지라면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재질과 형태, 명문의 형식과 내용 등이 시대마다 조금씩 달라 문학, 금석학, 미술사학 등 다방면의 연구에도 빠질 수 없는 귀중한 자료다. 이선제 묘지는 분청사기에 상감기법으로 글을 새겨 놓았다.

이선제는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한 후, ‘태종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찬에 참여했다. 벼슬은 형조·병조·예조에서 참의을 지냈고 강원도 관찰사와 호조참판, 예문관 제학까지 올랐다. 그는 1430년(세종 12년) 광주목사가 읍인에게 구타당한 불미스런 사건으로 광주목이 무진군으로 강등되자, 1451년(문종 원년) 상소를 통해 무진군을 광주목으로 복귀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향촌 질서를 바로 세우고자 향약을 보급하는 데도 적극 나섰다.

이만 한 업적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그의 생몰년조차 알 수 없었다. 이선제의 5대손인 이발(1544∼1589)이 ‘기축옥사’(선조대인 1589년 정여립의 난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이들이 유배를 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 문중 기록물들도 함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선제의 생몰년과 가족관계, 생애 등이 남아 있는 기록물이 바로 그의 묘지다. 묘지는 그가 한양에서 생을 마감하고, 이듬해 광주에 묻힐 때 제작됐다. 그런데 주인과 함께 편안히 잠들어 있어야 할 묘지는 이선제의 무덤이 도굴을 당하면서 긴긴 유랑을 시작했다.

제보조서 중 묘지실측도 1998년 5월 국내 문화재 밀매범이 국외반출을 시도하자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은 이를 막고 ‘제보조서`를 작성했다. 제보조서는 훗날 밀반출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어 환수의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일본으로 밀반출된 후 종적 사라진 묘지

이선제의 무덤이 도굴당했다는 사실은 후손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도굴범 일당이 흔적을 교묘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도굴 사실을 안 것이 1998년 9월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서였다. 검찰 발표 당시 묘지는 이미 일본으로 빼돌려진 상태였으나 그 전에 밀반출을 막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넉달 전인 같은 해 5월, 밀매단은 김해공항을 통해 반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묘지의 가치를 알아본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의 불허 조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문화재감정관실은 묘지 실측도가 포함된 제보조서를 상세히 남겼고,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을 비롯한 전국의 항만과 공항 문화재감정관실에 이를 배포했다. 추가적인 반출 시도를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묘지는 도난신고가 된 상태가 아니어서 압수하거나,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감정관실 관계자는 어떻게든 묘지 반출만은 막고자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훗날 이 제보조서는 묘지의 불법반출 사실을 입증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얼마 못 가 수포로 돌아갔다. 한 달 뒤 묘지는 김포공항을 통해 통관절차를 생략한 채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문화재 밀매단이 세관 공무원을 매수했던 것이다. 당시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묘지는 일본으로 반출된 직후 일본인 골동상에 500만엔에 팔렸으며, 그 뒤 종적을 감추었다.

묘지기증식 2017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이선제 묘지를 기증한 도도로키 구니에 여사(왼쪽)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김홍동 사무총장으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고 있다.
◆소장자와의 만남, 불법유출 결정적 증거 된 ‘제보조서’

묘지는 2014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10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일본사무소에서 도쿄지역 고미술상들을 상대로 한국문화재 유통조사를 실시하던 중 일본인 고미술상을 통해 묘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당시 묘지는 일본인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아이치현 도자미술관에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망자의 유물’이란 이유로 전시가 반려돼 소장자의 수장고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묘지 사진은 곧장 서울의 재단 본부로 보내졌다. 그리고 재단 본부는 1998년 묘지 밀반출 사실을 보도한 당시 신문기사와 김해공항 문화재감정관실에서 작성한 제보조서를 대조해 묘지의 반출경위를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묘지 반출경위를 파악된 이상 묘지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다. 묘지 소장자를 만나 입수경위를 직접 확인하고, 전문가 실견을 통해 묘지의 진위를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우선 재단은 당초 묘지를 소개했던 일본인 고미술상을 찾아가 소장자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장자의 미술품 대리인인 고미술상은 난색을 표했다. 믿고 맡긴 소장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것은 대리인의 당연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8년 작성된 제보조서를 보이며 묘지 밀반출 사실을 알렸고, 이를 확인한 고미술상은 결국 면담을 주선해주었다.

소장자 면담을 앞두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중 하나가 묘지에 명기된 이선제의 다섯째 아들 이형원의 행적을 주목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형원은 1479년(성종 10년) 조선통신사의 인솔 책임자인 정사로 임명되었는데, 성종에게 탄원해 수하의 일본인 통역사가 ‘본인의 원에 따라’ 고향인 쓰시마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적 배려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형원은 쓰시마에서 병을 얻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급거 귀국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
◆한일 양국 우의의 상징, 보물로 지정된 묘지

2015년 11월 후쿠오카의 한 병실에서 마침내 소장자 면담이 이뤄졌다. 소장자는 나가노의 명문 귀족 출신 70대 후반 남성으로 당시 암투병 중이었다. 먼저 소장자에게 묘지를 입수하게 된 경위를 직접 물었다. 형식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불법사실을 알고 입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이후 전개될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이 될 수 있어 반드시 직접 확인해야 하는 중요한 절차였다. 소장자는 2000년대 초반 불법사실을 모르고 묘지를 구입했던 것으로 보였다. 소장자가 고미술에 조예가 깊고, 명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란 점도 알게 되었다. 면담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소장자는 재단의 요청에 따라 전문가 실견 기회도 마련해 주었다.

2016년 1월 우리 측 전문가와 함께 묘지를 직접 조사하였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이선제 묘지가 틀림없었고 상태도 매우 양호했으며, 도자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물이었다. 재단은 이 자리에서 묘지의 명문에 등장하는 이선제의 아들 이형원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옛날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공무 수행 중 순직한 이형원은 묘지 주인의 아들이며, 그는 일본인 부하를 인도적으로 배려해 귀향을 도왔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묘지가 한국 후손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정식으로 반환도 요청했다.

“묘지는 일반적인 고미술품이 아닙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조상의 분신과 같습니다. 조상을 잃고 상심하는 후손들을 인도적으로 배려해주십시오.”

진품임을 확인한 재단은 곧장 이선제의 후손 광산이씨 문중을 찾았다.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협상 진행을 위한 위임장과 동의서를 조심스럽게 요청했다. 문중은 전문기관으로서 재단을 믿고, 흔쾌히 협상 권한을 위임했다. 아울러 묘지 반환 시 국가기관에 소유권 귀속도 약속했다.

협상 과정에서 소장자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유족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지난해 8월 무상기증을 결정했다. 한 달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최종 기증되었다. 기증식 참석을 위해 방한한 일본인 소장자의 부인은 남편 사진을 손에 들고 기증 소회를 밝혔다.

“이형원의 혼이 조선통신사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고 묘지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간 느낌입니다. 한·일 두 나라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의를 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묘지를 잘 지켜주세요.”

묘지는 ‘분청사기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묘지’란 명칭으로 지난 6월 보물 1993호로 지정됐고, 12월 10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