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김구'부터 문재인까지, 남북대화 그 결정적 순간들

입력 : 2018-09-15 07:50:00 수정 : 2018-09-14 18:13:5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갖기 위해 오는 18일 평양으로 간다.

남과 북이 갈라진 지 5번째 남북정상간의 만남이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3번째 회담이다.

문 대통령 방북을 계기로 분단 73년 동안 큰 족적을 남겼던 굵직한 남과 북의 접촉을 간추려 봤다.

△ 김구 ↔ 김일성,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 중도파인 김규식 선생과 함께 1948년 4월 서울을 떠나(김구 19일, 김규식 21일 출발) 평양으로 들어갔다.

4월 19일부터 26일까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서 김구 선생은 22일 인사말만 했고, 김규식 선생은 불참했다.

김구, 김규식은 북한의 실질적 지배자인 김일성의 뜻이 무엇인지를 직접 알아볼 필요가 있다며 요인 회담을 요구했다.

그 결과 4월 26일, 30일 4김회담(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회담이 열려 통일정부 수립, 단선단정 반대(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즉 남과 북 어느쪽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끄집어 냈지만 이를 실현시키진 못했다.

사진은 4김회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김일성 북한 주석과 김구 선생. 2005년 북한이 백범 기념관에 기증한 2장의 사진 중 한장이다. 

△ 박정희 형의 절친 황태성 사건, 1961년 9월~10월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군생활 내내 사상을 의심받았다. 이를 의식, 반공을 더욱 강조했다.

이런 박정희 정권초기인 1961년 10월 '간첩 황태성'사건이 터졌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가장 좋아했다는 형 박상희의 절친이다. 박상희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이다.

1946년 월북한 황태성은 상업성 부상까지 지낸 거물로 1961년 9월 비밀리에 월남했다. 단단한 인연의 끈이 있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만나 남과북에 도움되는 일을 하기 위해 내려왔다는 그였지만 10월 20일 체포돼 1963년 12월 14일 사형당했다.

황태성은 자신을 북한 밀사라 주장했지만 좌익 꼬리표를 떼어야 했던 박정희로부터 더욱 철저히 외면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 분단 후 첫 공식만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1971년 9월 20일


남과북이 분단 후 첫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1971년 9월20일 판문점에서 열렸던 제1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이다.

적십자회담은 그해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제의, 이를 북이 받아들이면서 시작됐다.

적십자 예비회담은 1972년 8월 11일까지 무려 25차례나 열렸다.

△ 분단 후 첫 공식 북한방문 '적십자 1차 본회담', 1972년 8월 29일~9월 2일

1차 남북적십자 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이범석(오른쪽) 등 남측 대표단과 북측 관계자가 1972년 7월 31일 옥류관에서 회식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통일부

한국적십자사 대표단은 1972년 8월 29일 평양으로 갔다. 분단이래 남측 대표단이 공식적으로 북한 땅을 밟은 첫 사례로 국내외에 엄청난 관심과 통일 단어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적십자 본회담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7차례 열렸다.

△ 박정희와 김일성 밀사 평양과 서울 교차방문, 1972년 5월 이후락 박성철

적십자 대표단의 평양방문에 앞서 남과북의 박정희와 김일성은 자신들의 밀사를 평양과 서울로 보내 남북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1972년 5월 4일 김일성 주석을, 박성철 부수상은 5월 31일 박정희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7월 4일 '자주통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담은 7·4 공동성명이 나왔다.

이후 남북회담은 7·4 공동성명을 기조로 진행돼 왔다.

△ 김일성과 나란히 선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표단, 1972년 11월 2~3일

1972년 11월 2일 김일성 주석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남북조절위원회 남과 북의 대표들. 오른쪽부터 장기영 전 부총리, 김일성 주석,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 북한 제1부상, 최규하 청와대 특보. 최 특보는 1979년말~1980년초까지 대통령으로 격동의 시절을 보냈다. 사진=통일부 

남북은 7·4 공동성명에 따라 남북관계와 통일문제를 정부차원에서 논의하기 위해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 6번의 회의를 가졌다.

1차 회의는 1972년 10월12일 판문점에서 열렸으며 2차 회의는 1972년 11월 2~3일 평양에서 열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단장으로 한 남측 대표단은 김일성 주석과 나란히 공식사진을 찍었다. 우리 정부 관계자가 공식적으로 김일성과 포즈를 취한 최초의 일이었다.

△ 남과 북 총리가 만난 고위급 회담, 1990년 

1990년 12월 11일 남북고위급 3차회담을 위해 서울을 찾은 연형묵 북한총리가 화동으로 나온 박예진(훗날 탤런트로 데뷔)어린으로부터 꽃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통일부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후반가지 남측의 군부독재 체제, 북측의 김일성 체제가 각기 다른 사정으로 두터운 방어막을 쌓은 관계로 남북관계는 평행선을 달렸다.

이러던 중 1988년 11월 북한 연형묵 총리가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을 제의했다.

우여곡적끝에 남북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남북고위급 회담 개최에 합의, 1990년 9월 4일 서울서 1차회담, 10월 16일 평양서 2차회담이 열리는 등 8차회담까지 이어져 오다가 파국을 맞았다.

△ 소떼 1001마리 몰고 고향찾은 정주영, 1998년 6월· 10월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가 고향인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는 1998년 전세계가 깜짝 놀랄 이벤트를 멋들어지게 만들어 냈다.

고향집에서 부친의 소 판돈 70원을 몰래 들고 가출, 한국 최고 재벌이 된 정 회장은 1998년 6월 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했다.

이어 같은해 10월 27일 소떼 501마리와 함께 2차 방북했다. 10월 30일 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정 회장 숙소인 백화원초대소를 찾아 깜짝 면담이 성사됐다.

△ 1차 남북정상회담, 2000년 6월 13~15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을 내세워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김 대통령은 2000년 6월13일 공군 1호기를 타고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예고없이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마중을 나왔으며 김 전 대통령은 북한 인민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 노무현 DMZ를 걸어서 넘어간 최초의 대통령, 2007년 10월2일~4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2007년 10월 2일 걸어서 군사분계선(MDL)을 넘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MDL을 걸어서 넘은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차량을 타고 평양으로 가 김정일 위원장과 회담하고 향해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 남과북 정상이 함께 DMZ 넘어, 2018년 4월 27일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에서 역사적인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만난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깜짝 제의'에 따라 함께 손을 맞잡고 잠시 DMZ를 넘어, 즉 월북해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 역사적인 북미정상회담 물꼬 튼 통일각 4차 남북정상회담, 2018년 5월 26일

북미정상회담이 성사 일보직전 비틀거리자 문재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직접 만나 막힌 물줄기를 트기로 했다.

막후 교섭끝에 비밀리에 2018년 5월 26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만나 6·12 북미 정상회담 성공을 위한 긴밀한 협력과 4·27 판문점 선언의 조속한 이행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사진=청와대 공동취재단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
  • 비웨이브 제나 '깜찍하게'
  • 정은지 '해맑은 미소'
  • 에스파 카리나 '여신 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