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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의동행] 자연이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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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9-11 21:44:49      수정 : 2018-09-11 21:44:50
호박고지를 만들었다. 겨우내 먹을 욕심으로 양도 넉넉하게 잡았다. 바짝 마른 뒤의 상태를 생각해 약간 두툼하게 썰고, 그것들을 채반에 담아 햇볕 좋은 쪽에 놓아두었다. 금세 잘린 단면에서 호박의 진액이 작은 이슬방울처럼 배어나왔다. 이제 다음 일은 햇볕의 몫이었다. 이제까지 호박을 여물게 하고 튼실하게 키워왔듯 고지도 그렇게 만들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었다. 쟁쟁한 햇볕에 호박은 진액의 수분을 날리고 꼬들꼬들 말라가면서 이전에는 없는 다른 영양소도 품을 것이다. 그건 순전히 햇볕이 주는 선물이었다. 한겨울 그것들은 햇볕의 기미를 품은 채 그렇게 우리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들깻가루를 넣고 자박자박 졸이듯 익혀낸 그 호박고지나물에서 나는 지난 추억을 소환해내며 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영양분으로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로 나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호박조각을 들여다보았다. 햇볕을 좇아 채반을 옮기고, 아침저녁으로 그것들을 거두어들이며 정성을 기울였다. 기실 한여름 햇볕이 쨍쨍할 때 만들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납던 햇볕이 위세를 잃고 아침저녁으로 선득한 바람이 불고 나서야 호박고지를 생각해냈다. 그래도 벼를 익히고, 과육의 당도를 높이는 햇볕을 믿어보자는 마음이 호박을 말릴 엄두를 내게 만들었다. 한데 아파트 베란다 햇볕은 야박하기 짝이 없어서 금세 그늘이 찾아왔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호박에 융단 같은 푸른곰팡이가 앉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곰팡이 핀 조각을 골라내면서 마음이 찜찜했다. 당장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곰팡이 포자들은 사이사이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곰팡이 핀 조각을 골라내면서 갈등했다. 그냥 다 버려야 할지, 아니면 곰팡이 핀 조각만 골라내야 할지. 전기건조기를 사용하면 손쉽게 말린 호박을 얻을 수 있고, 또 시장에 나가면 얼마든지 한겨울 혹한에도 푸르고 싱싱한 호박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이게 웬 생고생이냐는 생각도 들었다.

옛날에는 미리미리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한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었다. 시대가 좋아 지금은 그런 수고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옛날이 더 조화로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푸성귀를 말리고, 가을걷이로 한해 농사를 마무리 지으며 가족과 조상을 생각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더 인간답고 애틋하지 않은가. 때늦은 호박고지를 만들면서 또 하나 드는 각성은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것이다. 때를 놓치면 그만큼 더 힘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를 놓쳤다고 아예 포기해버린다면 그마저도 얻을 수 없으니 어쩌랴. 늦었더라도 시작해야 그나마 아쉬움이 덜하지 않겠는가. 올겨울에는 어머니의 손맛을 기억하며 들깻가루를 넣은 맛있는 호박고지나물을 먹어야겠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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