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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2기 민주당은 왜 이해찬을 소환했는가[김용출의 스토리]

입력 : 2018-09-08 11:00:00 수정 : 2018-11-10 08: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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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임 대표의 정치 역정과 전망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이해찬 전 총리가 지난달 25일 선출됐다. 7선 국회의원에 정책위 의장을 세 차례나 경험했고, 당 대표도 2012년 이미 한차례 역임했으며, 교육부장관 및 총리까지 했던 그가 여당 대표로 재소환된 것이다.

이해찬은 왜 ‘문재인 정권 2기’ 집권 여당의 대표가 됐을까. 2007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3등으로 낙선한 뒤 대권에서는 사실상 멀어졌다고 지적받는 그를 민주당은 왜 소환했을까. 보이지 않는 답을 찾기 위해선 먼저 그의 삶을 길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학생들 집으로 내려갔느냐” 아버지 말에 학생운동

1972년 10월27일, 박정희 정권이 유신을 선포했다. 이해찬은 각 대학에 휴교령이 선포돼 고향인 충남 청양으로 내려갔다. 청양면장 출신이던 아버지 이인용은 그를 불러 앉혀놓고 물었다.

“학생들은 다 집으로 내려갔니? 휴교가 끝나면 어떻게 한다더냐?”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물음에 크게 당황했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 휴교했다고 다들 고향으로 갔단 말이냐’는 질책이 담겨 있어서다.

며칠 뒤, 이해찬은 서울로 올라가 학생운동 서클에 가입했다. 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아버지의 그 말은 1987년까지 이어진 16년간의 학생운동 원점이었다.

이해찬은 1952년 충남 청양에서 청양면장 출신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의 5남2녀 중 다섯째로 출생했다. 그가 ‘이 면장댁 셋째 아들’로 불린 이유다. 일본 주오대(中央大) 유학파 출신인 아버지는 담백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해찬은 청양초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덕수중, 용산고를 거쳐 1971년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신군부 겨냥 “당신들 10년 못가”…2번의 투옥과 6월 항쟁 주도

이해찬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11개월간 투옥됐다가 풀려났다. 하지만 서울대에서 제적돼 무역회사를 다니거나 출판사 ‘범우사’에서 일하는 등 이런저런 일을 하며 생계비를 벌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던 김정옥과 결혼, 딸(현주씨)을 두고 있다. 그는 이때 서울대 근처 신림동에 고시생들이 자주 찾던 ‘광장서적’을 개업했다.

“박정희(전 대통령)가 18년 만에 비참한 종말을 고했듯이, 당신들 전두환 일당도 10년이 못가 망할 것이다.”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렀던 1980년 5월, 비상군법회의 재판정.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다시 구속된 이해찬은 최후 진술에서 포효했다. 2번째 옥고였다.

안동교도소에서 수감돼 있을 때, 면회 온 어머니와 아내, 2살배기 딸 현주의 뒷모습에 미안함과 비통함에 많은 눈물을 흘린 그였다.

2년6개월을 복역한 뒤 풀려난 이해찬은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활동했고 1987년 박종철고문치사 사건 이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6월 항쟁을 주도했다.

◆“민주주의 위해” 정치권으로…정책 및 기획통으로 맹활약

“(1987년) 6월 거리에 분출되던 평범한 시민의 요구와 힘, 한국 민주주의를 발전하려면 그 요구를 묶어야 했고, 한국 사회를 바꿔 나가려면 그 힘들이 움직여야 했다. ‘재야’로 통칭되던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형식과 방식은 그런 요구와 힘들을 담아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였다.”(90쪽)

이해찬은 이런 판단으로 1988년 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 다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입당했다. 정당과 관련한 강렬한 첫 번째 ‘원체험’이었다. 그는 곧이어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구에 출마해 민정당 김종인 의원과 통일민주당 김수한 의원을 물리치고 당선됐다. 그의 나이 36세. 이후 6차례 국회의원에 더 당선됐다.

초선 의원 시절, 이해찬에게는 ‘송곳’ 또는 ‘면도날’ 등의 수식어가 붙곤 했다. 국회 노동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맹활약했다. 광주특위에서도 활약, 청문회 스타로 뜨기도 했다. 그는 1991년 6월 지방선거 공천 문제를 지적하며 탈당했다가 야권이 통합된 뒤 다시 입당했다.

이해찬은 당내에서 주로 정책을 다뤘다. 1996년 정책위 의장을 시작으로 정책위 의장만 3번을 역임했다. 선거 기간엔 선거 전략을 짰다. 1992년 대통령 선거, 1995년 15대 총선, 1997년 대통령 선거, 2002년 대선 등에서 모두 선거 전략을 맡았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힘을 보탠 그는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기도 했다.

◆서울시 부시장으로 첫 행정 경험…국민의정부 초대 교육부장관

1995년 6월. 초대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조순 후보는 지지율이 꾸준히 오르며 선두인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 거의 근접했지만 마지막 2퍼센트가 부족했다. 젊은층 지지가 낮은 게 문제였다. 승부수로 젊은층에 어필할 인물을 정무부시장으로 지명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젊은 정무부시장을 지명하면 7만표 정도를 더 얻는다는 거였다. 그가 나섰다. 결국 조순 시장이 역전 승리하면서 그는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됐다. 첫 행정 업무를 경험했다.

김대중 정부가 막 출범한 1998년 3월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사무실. 이해찬은 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사람들과 이런저런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청와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 의원, 교육부 장관을 맡게 됐습니다. 20분 뒤에 내각 명단을 공식 발표하니 그리 아십시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교육부장관에 임명돼 1년 3개월간 장관직을 수행했다. 고교 평준화, 보충수업 폐지 등 개혁을 밀어붙였지만, 교원 정년을 만 65세에서 62세로 단축시켜 교육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참여정부의 두 번째 총리…‘분권형 책임총리’ 전형으로

“저녁이나 함께 먹자.”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해찬은 노 대통령과 저녁을 먹으며 3시간 동안 탄핵 사태나 시국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노 대통령이 덤덤하게 총리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농담하시느냐?”

노 대통령은 정색하며 답했다.

“내가 왜 농담을 하겠느냐. 책임지고 제대로 일할 총리가 필요하다.”

이해찬은 2004년 6월 참여정부의 두 번째인 제36대 총리가 됐다. 그는 1년9개월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책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을 펴낸 정두언 전 국회의원은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은 이회창, 이해찬 전 총리 정도다. 대부분 법에 정해진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의전총리, 대독총리에 그쳤다”며 이해찬을 제대로 일한 총리라고 호평했다.

실제 이해찬은 방폐장 부지 선정 문제를 해결하는 등 책임총리로서 많은 업무 성과를 냈다. 유시민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됐을 때 반대했다가 노 대통령이 “이것만은 양보하지 못한다”고 하자 물러서거나,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 반대하는 등 일부 의견 차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노 대통령과 거의 대부분 사안에서 척척 호흡을 맞췄다. ‘분권형 책임총리’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물론 정치권과 언론 등과 불화도 있었다. 2004년 10월 독일 순방 당시 특파원 간담회에서 “전두환, 노태우(전 대통령)는 용서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용서 못한다” “조선, 동아가 나라를 흔들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발언해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일은 잘하는데” 꼬리표 이해찬, 왜 소환됐을까

“일은 잘하는데….”

이해찬에 대해 평가할 때 따라오는 말 가운데 하나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정책통’ ‘기획통’이자, 교육부장관과 책임총리제까지 경험한 베테랑 정치인이며, 친노(친노무현) 좌장이지만 단점 또는 약점도 적지 않아서다.

우선 대중적 자질이 부족한 점이 지적된다. 특히 야당과 언론에 대해서도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것으로 비쳐진다. 이해찬 스스로도 이 점은 인정한다. “나는 내가 대중적인 자질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흔쾌히 동의한다. 인상도 깐깐하고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적 수사’를 싫어하며 ‘포장’이나 ‘홍보’에 약하다.”(44쪽)

‘버럭 해찬’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상대방의 반응이 합리적인 기준을 넘어서면 격분해 ‘버럭’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얻은 ‘버럭 해찬’이란 별명에 유감은 없다”(83쪽)고 설명하지만, 그럼에도 대중 정치인에겐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상대 정당이나 언론 등에 불안과 반발을 쉽게 야기할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왜 이해찬을 대표로 소환했을까. 더구나 지금은 정권 교체의 환호와 남북 관계의 해빙, 북미 대화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문재인 정권 1기’가 아니다. 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50%선까지 무너졌고 민생경제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한 ‘정권 2기’이다.

◆당 안정시키고 질서 있는 변화 추진해야

우선 집권 여당인 민주당을 단합시키고 안정시키는 것이 고려됐을 것이다. 즉 당의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질서 있는 변화를 이끌어달라는 취지일 것이다. 이해찬은 7선 중진 의원에 교육부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데다가, 2007년 이미 한차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낙선해 대권 가도에서 두어발 빗겨나 있다는 점에서 그만한 사람도 흔치 않다는 분석이다.

더구나 이해찬은 당의 안정적 관리와 시스템화에 대한 고민과 좌절 경험도 있다. 열린우리당 창당 때에는 당 대표(의장)와 대선 후보를 철저히 분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좌절되기도 했다. 즉 제왕적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 새 리더십을 만들되 대선 후보에 의한 ‘당의 사유화’를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나는 당의장은 당의 노선을 관리하면서 필요할 때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당 조직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재적 대선 후보가 당의장을 맡을 경우 당 조직은 필연적으로 세력 싸움에 휘말리게 돼 있다. 당 의장으로 선출된 후보는 당 조직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운영하려고 할테고, 그와 경쟁하는 후보들은 당연히 그에 맞설 것이기 때문이다.”(101쪽)

◆국정 주도하면서 당정청 관계 재정립 과제도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선두에서 주도하는 ‘문재인 정권 1기’가 아닌, 당과 국회가 국정운영을 이끌어가는 ‘정권 2기’라는 시기적 특성에 맞게 당을 이끌고 당정청 관계를 재구축하라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즉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가 아닌 수평적이고 주도적으로 국정 운영을 돕되 당정청 관계를 다시 짜라는 의미다.

이해찬은 “국가를 운영하는 데 제일 중요한 건 경중을 가리는 것이고, 그 다음이 선후의 완급을 잘 가리는 겁니다”(2010, 22쪽)라고 국정 운영의 핵심을 제시할 정도로, 경중과 선후 완급 조율 경험이 중요한 국정 경험이 풍부한 정치가다.

더구나 그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따라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정치인이다. 지위 중심의 사고가 아닌 과제 중심의 사고를 한다는 점에서 임무 수행에 적격이라는 평가다. 그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나의 인생 패러다임이 아니었다. ‘지금 무엇이 필요한가. 그 중에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나의 패러다임이었다.”(25쪽)

◆선두에서 다수 야당과 협치 주도해야

여소야대 국회에 둘러싸인 소수 정권의 여당 대표로서 다수 야당과 협치를 잘 리드해달라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이 대표는 지난 25일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최고 수준의 협치를 추진하겠다”고 협치를 주도할 것임을 우선 천명했다.

물론 보수 언론은 장관과 총리 시절 야당 및 언론과 불화했던 그의 행적을 꺼내며 회의감을 피력한다. “...거친 언행으로 야당과 갈등을 빚곤 했다.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을 ‘차떼기당’으로 불러 국회를 보름 가까이 파행시킨 일도 있다”(조선일보 2018년 8월27일자 사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찬은 자신의 가치와 비전, 방향을 견지하면서도 방법에 있어선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이며 전략적이라는 점에서, 친노친문의 좌장이라는 점에서 야당과의 협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는 실제 “가치는 역사에서 배우고 방법은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현실이 아무리 지리멸렬해 보여도 길은 그 속에 있다”(108쪽)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더구나 불철저한 근본주의자가 아닌 성실한 개량주의자를 자임해온 그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는 불성실하고 불철저한 근본주의자보다는 성실하고 철저한 개량주의자가 사회의 진보에 훨씬 기여한다”(48쪽)는 생각에서다.

◆‘20년 연속 집권론’, 구호 아닌 결과적으로 성취해야

이 대표는 ‘민주당 20년 연속 집권’을 주장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개혁 정권은 ‘하나의 점’ 수준으로 매우 짧았다며 평화체제 확립과 민주주의 성숙, 정의로운 복지국가 등을 위해선 20년 연속집권해야 한다는 거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10년은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점’입니다. 정조대왕이 돌아가신 해가 1800년입니다. 개혁적인 왕이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209년이 지났는데(2009년 기준), 그동안 민주개혁적인 국가지도자가 정권을 잡았던 시절은 10년밖에 없습니다. 209년 중 딱 10년뿐입니다.”(24쪽)

국정의 단절에 따른 좌절과 부작용 등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공허한 구호처럼 외쳐서 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20년 연속 집권’이라는 그의 소망은 자체 계획과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으론 그와 민주당에 부여된 시대적 과제-당의 안정적인 관리과 질서 있는 개혁의 추진, 국정의 주도적 참여와 운영, 야당과의 적극적인 협치-를 잘 수행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이다. 날은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그의 어깨는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이 글에 사용된 직접 인용은 △이해찬(2007). [청양 이면장댁 셋째 아들 이해찬]. 파주: 푸른나무 △이해찬(2010). <노무현의 꿈>.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17-47쪽). 서울: 오마이북에서 가져 왔음을 미리 밝힌다.

김용출 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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