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조용호의 나마스테!] “통일이라는 대사업 앞둔 이때… ‘문화적 대폭발’도 일어날 것”

입력 : 2018-09-04 03:00:00 수정 : 2018-09-03 21:04:4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평론집 ‘문학과 진보’ 펴낸 최원식 교수 “나는 요새 세상이 납작해졌다고 봐요. 문학에 불리한 조건이지요. 문학적 천재는 각이 있어야지 둥글면 안 돼요. 요새는 그 각을 잘라내는 경향이 있어요. 납작해진 세상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천재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게 비평가들의 기능이라고 봐요. 문학은 뭐라고 해도 자기 시대와 불화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핵심이지요.”

한국 문단의 핵심 축 하나를 지탱한 ‘창비’의 평론가 최원식(69) 인하대 명예교수가 평론집 ‘문학과 진보’(창비·사진)를 펴냈다. 본격 평론을 모은 평론집으로는 마지막이라고 스스로 밝힌 책이다. 민족문학 진영의 중심에 서서 비평을 해온 그는 ‘좋았던 시절’과 달리 문학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환경에서 작금 한국문학의 향배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계명대와 영남대를 거쳐 33년간 재직했던 인하대에서 2015년 정년퇴직한 뒤 새로 둥지를 튼 인천 학익동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최원식은 “1970년대 민족 민중문학으로 돌아가자는 건 아니다”면서도 “민족문학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마지막 평론집’을 펴낸 문학평론가 최원식. 그는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더 깊은 실감 속에 민족문학 없는 진보의 틈을 궁리한 애쓴 길찾기가 여기 모은 글들의 면목”이라고 썼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번역한 이식적 성격의 ‘참여문학’ 대신 표현의 자유와 민주와 통일을 내거는 ‘민족문학’이 한반도 현실에 적합했지요. 남북이 만났을 때 양쪽 문학을 아우르는 의미에서 민족문학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제 뒤엎을 수 없는 단계까지 왔지만 안으로도 민주주의는 완성된 게 아니라 끝없는 도정에 있습니다. 민족문학을 깃발처럼 들고 다니는 시대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한 건 사실이지요.”

그는 ‘좋았던 시절’처럼 문학이 한반도의 현실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 묻자, ‘문화의 대폭발’을 거론했다. 지금처럼 한반도의 운명이 중대하게 갈리는 시기, 통일이라는 ‘대사업’을 앞둔 시점에는 과거 문명사를 되돌아볼 때 문화적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다.

“우리 통일사업이 중대한 국면에 있는데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북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평화를 가져오고, 한반도라는 화약고가 세계평화까지 가져오는 사업 앞이나 뒤에 과거의 예들처럼 문화적 폭발이 예견됩니다. 영국이 섬나라 침략의 역사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셰익스피어가 나왔고, 독일도 역사적 전환기에 괴테가 나와 독일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추동했지요. 이탈리아에서도 통일 직전에 베르디 오페라의 폭발이 있었습니다. 희한하게 대사업 앞뒤에는 문화적 폭발이 일어났어요.”

그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라고 했다. 3·1운동이야말로 그냥 운동이 아니라 문화적 폭발이었다고 규정한다.

“3·1운동 세대가 1920년대 신문학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냈고 우리는 지금도 그 제도 속에 살고 있어요. 서정시 단편 장편 희곡, 이 제도가 그 당시에 만들졌던 거예요. 김소월을 비롯한 그때 시인 소설가의 작품 한 편 한 편이 한국 근대문학을 만들어놓은 과정이었죠. 나는 어떤 문화적 폭발이 일어날지 지금 굉장히 궁금해요. 3·1운동이 근대문학을 만들어놓고 4월혁명이 새로운 문학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또 다른 새로운 문학이 절실한 시점이지요.”

그는 새로운 싹을 이미 목도하고 있다고 했다. 젊은 작가들이 과거 김지하 황석영 스타일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성과 새로운 예술성을 획득해야 하는데 그 기미가 보인다는 판단이다. 현단계는 앞시대와는 다른 단계로 가는 암중모색의 국면이라고 했다. 이런 환경일수록 비평의 역할이 중요한데 정작 존재감이 현저하게 약화된 형국이다. 그는 이번 책에서 “평론가가 작가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책 읽은 자랑이나 늘어놓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요령부득의 글쓰기를 능사로 삼는” 현실에 대해 개탄했다. 2015년 신경숙 표절 파문과 관련해 자신이 ‘창비’ 주간 재직 시절 나온 소설집이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애초 신경숙 작품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을 때 제대로 된 비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실이 가장 뼈아프다고 진술했다.

“비평의 핵은 뭐라 해도 비판이지요. 비평이라는 건 살아 있는 작가들과의 대화인 만큼 어차피 협상이기도 합니다. 어떡하든 내부를 읽고 그 작가가 더 훌륭한 창작으로 나아가게 도와주는 게 비평 아닌가요. 협상의 기술이기도 하죠. 비판하더라도 강도라든가 여러 가지를 조절하면서 각 작가에 맞게 문제를 제기하는 거죠. 비판을 제대로 보전하기 위해서는 말을 건네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그는 비평가란 작가의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니며, 작가 앞에서 작아져서도 커져서도 안 된다고 했다. 비평가란 좋은 독자라는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데서 출발하고 싶다고 썼다. ‘자력갱생의 시학’에서는 한국 시에도 도래한 위기에 대해서 성찰했다. 그는 “세태의 경박함에 탓을 돌리는 사이비 귀족주의는 정말 사절”이라며 “골방에서 웅얼거리는 난해시의 아류도 고통이지만, 쉬우면서도 지루한 시는 못내 괴롭고, 공연히 행갈이를 포기하고 김빠진 맥주 같은 산문 한 토막을 시의 이름으로 양산하는 최근 산문시는 더욱 질색”이라고 일갈했다. 김수영 50주기 심포지엄을 앞두고 김수영론을 집필 중인 그는 민족·민중문학 진영에서 부정됐던 김수영이 최근 이 진영의 최대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고 전했다.

최원식은 1999년 이른바 회통론(‘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을 발표하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양쪽 진영으로부터 욕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는 사실 김수영이야말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회통 사례라고 말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30년대 프로 문학과 모더니즘은 정세에 따라 숨바꼭질을 했을 뿐 동시에 전개된 회통의 뿌리라고 보았다. 그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라는 파블로 네루다의 말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일찍이 자신에게 창작의 재주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책을 좋아했는데 다행히 제물포고 선배들(김흥규 조남현)을 잘 만나 연구자의 길도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 뒤, 서울대 국문과에 들어가 비평가의 길을 일찌감치 걷기 시작했다. 그는 1977년 평론을 기고하면서 창비와 인연을 맺은 이래 주간까지 장기 역임하면서 40여년간 창비의 평론가로 살아왔다. 그는 “창비는 무명의 필자였던 나에게 기회를 준 고마운 존재”라면서 “문학적 후속 세대를 적극적으로 확보하지 못한 건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또래 문인들의 발문 정도는 쓰겠지만 이제 본격 평론은 접겠다고 했다. 대신 국문학자라면 마지막 과제로 설정하는 문학사 정리에 힘을 쏟을 예정이다. 이에 앞서 단재 신채호의 ‘이순신전’과 박태원이 해설한 충무공 조카 ‘이분’의 이순신전을 정리해 해제와 함께 책을 내는 일을 먼저 마무리할 생각이다. 작금 문학 환경에 절망하는 이들에게 당부하는 말.

“왕년에 문인들이 누렸던 문학에 대한 존중이 약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적 기능을 만들어내야 하는 부담이 굉장히 크지요. 그렇지만 이전과는 다른 사회성과 예술성을 만들어낼 거라고 봅니다. 이 명예로운 일을 작가들이 반드시 완성해야 우리나라가 진짜 제대로 21세기로 이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간절합니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