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정길연의사람In] 모래시계가 놓인 풍경

관련이슈 정길연의 사람in

입력 : 2018-08-17 23:35:03 수정 : 2018-08-17 23:35:0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집 앞 마트에 들를 때마다 예상치 못한 검색(?)을 받는다. 여든 안쪽의 노부인 몇 분이 매장 입구에 앉아 오가는 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건둥반둥 훑는 식이나, 돌연 초롱초롱해져 누군가의 위아래와 뒤통수까지 차례로 살핀 다음 방면할 때도 있다. 살 물건이 있어 마트에 나왔다가 잠시 다리쉼을 한다기보다 애당초 소일이 목적인 것이다. 잘은 모르되 푹푹 삶는 찜통더위에 딱히 갈 곳도, 어디 불러주는 곳도 없었을 터.

내 감으로는, 남자 노인은 이 잔혹한 여름날 피서 겸 시간나기로 지하철을 타고 종점을 오가거나, 공원 그늘이나 넓고 시원한 공항 로비를 기웃거리는 쪽이다. 그에 비해 여자 노인은 대체로 동네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처음부터 동무와 함께이거나 동무를 만나러 나오는 게 다르다면 다르다. 이럴 때 에어컨 빵빵하게 돌아가는 쇼핑몰만 한 데가 있으랴.

마트 밖은 밖대로 약간의 부담을 안고 통과해야 할 검색 구역이 있다. 역시나 칠순 안팎 할머니 몇 분이 난전을 펴고 마트에서 나오는 사람의 장바구니를 유심히 쳐다보기 때문이다. 어쩌다 펼쳐놓은 푸성귀를 집어 들 때도 있지만 대개는 눈 마주치지 않으려 후닥닥 지나친다. 그쪽에서야 근력이 허락하는 한 무엇이라도 하려는 근실함이겠으나, 소일거리일 수만은 없는 속사정이 있겠거니 싶어지면 내 마음도 고단하다.

솔직히 화도 난다. 사정없이 내리꽂는 태양광선과 고온의 지열과 미세먼지와 배기가스를 그깟 머릿수건과 쿨토시와 얼린 보리차 따위로 막아내야 하는 속사정에. 떨어질 줄 모르는 수은주처럼 벌겋게 익은 얼굴로 상대해야 하는 불친절한 삶의 조건에. 더러 혹독한 날씨보다 일상의 무위를 더 견디지 못하는 억척스러움에.

전에 없던 동지의식이라 할까, 그들의 깊은 주름살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나 또한 조금씩 후반의 시간대에 진입하고 있다는 방증이겠다. 그리고 궁금하다. 도대체 저 인생의 선배들은 하루하루 무슨 생각을 하며 눈을 뜨고 감을까. 나의 미래이기도 한 저 선배들은 세상의 폭력적인 무신경을, 혹은 투명인간처럼 외면당하는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번 여름은 유달리 길고 가혹하다. 온갖 이슈의 아우성 속에서 노년을 위한 목소리는 희미하다. 언젠가 흐릿해질 그림 속 풍경처럼 그들의 시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내게도 차차 있을 일이겠다.

정길연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최지우 '여신 미소'
  • 최지우 '여신 미소'
  • 이다희 '깜찍한 볼하트'
  • 뉴진스 다니엘 '심쿵 볼하트'
  • 비웨이브 아인 '미소 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