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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삶,나의길] 보수·진보 넘나들며 ‘화합의 정치’…대통령 비서실장 땐 ‘쓴소리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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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8-11 06:00:00 수정 : 2018-08-10 20: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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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권 前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 노태우 정부 때 정무수석 / 민주정의당서 국회의원 3선 / 법사위원장 맡아 날치기 근절 / 14대 총선 낙선 후 청와대로 / DJ 대통령이 ‘삼고초려’ /“영호남 화해 이루자” 설득에 / 거절하며 버티다 끝내 수락 / ‘20억 전달 대가설' 사실 아냐 / 비서실장은 직언하는 자리 / 내각 간섭하거나 압박 안 돼 / 인사 검증서 문제 드러나면 / 아무리 간청해도 수용 거부 김대중(DJ)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79)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11대 총선 때 경북 영덕·청송·울진지역에 민주정의당 공천으로 출마해 13대까지 연달아 당선된 보수인사였다. 김 전 대표는 14대 총선 낙선 후엔 노태우정부 마지막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을 했다. 그런 그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섰던 호남 출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근에서 모신 데 이어 집권당 대표최고위원에 등용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자택에서 김 전 대표를 만나 DJ와의 만남,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며 겪은 권력 핵심부의 뒷얘기 등을 들어봤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출신답게 그는 여러 차례 “청와대 관련 얘기를 더 해야겠다”며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대통령 보좌진 역할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사심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영부인과 비서실장”이라며 “영부인은 부부니까 무슨 말인들 할 수 있고, 실장은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보고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보통 대통령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권위에 눌려 순한 양이 된다”며 “비서실장이 그렇게 돼 버리면 대통령에게 직언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또 “(실장이) 다음 자리를 생각하면 대통령의 뜻에 맞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이 잘못 말하는데도 ‘맞습니다’라고 맞장구만 치면 안 된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설득해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 전 대표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돼 공관으로 이사하며 당시 북아현동에 있는 집을 전세를 놓지 않고 비워 뒀다. 대통령이 피로감을 느끼거나 싫어하면 곧바로 집에 돌아와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김 전 대표는 “대통령 비서실은 내각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며 정부가 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DJ를 ‘그분’이라고 깍듯이 예우했다.
김대중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지난 5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자택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이 자신의 거취 등 보신을 생각하면 바르게 모시기 어렵다. 그것을 초극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물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상윤 기자

―DJ정부에서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배경은.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40여일 앞두고 김 전 대통령 요청으로 만났더니 ‘도와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DJ 차례라고 주변에 말하는 등 이미 총재님을 돕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김 전 대통령은 ‘입당해서 도와달라’고 해 대선 전략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해 12월18일 대선에서 그분이 당선돼 내 임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3월 지방 대학 총장으로 가기로 돼 있었다. 선거가 끝난 이틀 뒤인 12월20일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 일산 자택에서 만나자고 해 뵀더니 ‘새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달라’고 해 깜짝 놀랐다. 그분은 ‘영호남 화해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야 한다. 또 청와대 경험이 있는 당신만큼 우수한 사람이 없다’며 비서실장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나는 취임식까지 시간이 충분히 있어 (실장을) 확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사양했다. 또 노태우정부에서 정무수석을 해 어떤 돌발변수가 생길지 모른다는 말씀도 드렸다. 이틀 뒤인 22일에도 김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일산에 갔으나 그분의 간곡한 말씀에도 나는 계속 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사흘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날 저녁 그분은 다시 나를 부르더니 ‘불문곡직하고 임명하겠다’며 통첩해 비서실장을 맡았다.”

―노태우정부에서 대통령 정무수석을 하며 DJ에게 20억원을 전달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2년 14대 대선에 앞서 ‘9·18(9월18일) 결단’을 했다. 집권당인 민자당을 탈당하고 중립선거관리내각을 구성해 대선을 치른다는 내용이다. 당시 김영삼(YS) 민자당 대통령 후보도 관권선거 시비를 원천 차단하는 의미가 있다며 찬성했다. 그런데 당에서 난리가 났고, 특히 YS가 이끄는 민주계가 노 전 대통령이 선거를 돕지 않으려는 의도라며 강력 반발했다. 여기에 동조한 YS도 ‘노 전 대통령이 무책임하다’며 청와대를 공격했다. 9·18 결단 후 노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인 YS, DJ,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를 청와대로 초치해 식사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이 9·18 결단 계기 등을 설명하자, DJ가 자리에서 일어나 노 전 대통령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며 환영했다. 얼마 후 노 전 대통령이 DJ를 만나고 오라고 했는데 왜 나를 그분에게 보내는지 말하지 않아도 그때 분위기상 알 수 있었다. 돈을 갖다 주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준비한 와이셔츠 박스를 목동 처제 집에 있는 김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이것은 내가 무덤에 갈 때까지 영원한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95년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졌고, 그때 중국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 모 비서관으로부터 20억원을 전달받았다고 먼저 고백을 해버렸다. 돈을 전달한 것이 맞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비서관이냐. 난 수석비서관’이라며 펄쩍 뛰었다.”

―20억원을 전달한 것이 대통령 비서실장 기용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혹자는 김중권이가 20억원을 전달해 김 전 대통령이 고마운 마음으로 비서실장에 발탁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분이 고백하지 않고 계속 비밀로 했으면 나한데 잡힌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 그런데 다 드러나 버렸잖아.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 들었는데 13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국회법사위원장을 할 때 날치기를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지킨 나를 김 전 대통령은 ‘법사위원장이 괜찮은 위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

―비서실은 어떻게 운영했나.

“대통령에게 첫 보고를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전 정부에서는 대통령이 등청 후 비자금을 포함해 재정을 담당한 경호실장을 가장 먼저 만났다. 나는 비서실장이 첫 보고자가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등청 전 실장실에서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거기서 논의된 내용을 대통령께 보고했다. 청와대 본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대통령이 차에서 내리면 2층 집무실로 함께 올라가 보고를 했다. 또 비서실장 사무실이 비서동에 있었는데 본관 대통령 집무실 옆에 마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전에는 비서실장이 본관에 있는 ‘대기실’에서 결재에 앞서 기다렸다가 보고를 했는데 대통령과 수시로 대면하기 위해서는 비서실장 집무실이 필요하다고 여겨 이를 관철했다. 비서실장 사무실이 두 개였다.”

―비서실장 때 일화를 소개하면.

“김 전 대통령이 비서실장에 내정하며 이강래·장성민 전 의원, 박금옥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 등 5명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주며 ‘인사 때 쓰라’고 말씀하셨다. 검증 과정에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인사의 허위 이력이 드러나는 등 문제점이 많아 도저히 그를 채용할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에게 검증결과를 보고했더니 ‘선거 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며 아쉬워해 청와대는 안 되며 당에서 일하면 된다고 건의했다. 검증에서 걸린 그 인사는 나를 찾아와 ‘실장님, 청와대에 단 하루라도 근무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훗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구속됐다. 또 김 전 대통령이 ‘아무개’를 정무수석으로 임명하신다고 해 내가 보니까 그 사람은 아니야. 대통령께 ‘저는 비서실장이 마지막 공직입니다. 훌륭한 대통령으로 길이 남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고 말씀드리며 대통령 정무수석은 당 중진과 대화 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문희상 전 의원(현 국회의장)을 대안으로 제시했고, 그가 정무수석으로 임명됐다. 그는 생각이 바르고 건실했다.”

―DJ가 김 전 대표를 여당 대표로 임명했다.

“비서실장을 마지막 공직으로 생각했는데 16대 총선에서 영남지역에 출마해 당선돼야 한다는 그 분의 뜻이 워낙 강해 거절하기 어려웠다. 경북 울진·봉화에서 출마했으나 16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해 8월에 전당대회가 개최됐는데 그 분의 권유로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해 3등을 했다. 1등 한화갑, 2등 이인제 후보였고 2위와 불과 90여표 차이였다. 최고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대표최고위원으로 임명됐다. 당시 당헌은 당 총재가 대표최고위원을 임명하면 당무회의에서 승인하도록 돼 있었다.”

―DJP 공동정부에서 힘들었던 점은.

“어느 날 총리공관에서 김종필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자민련 당무회의가 열렸는데 내각제를 놓고 심야까지 격론이 이어졌다. 강경파는 DJ가 대선 공약인 내각제를 추진하지 않으면 공동정부를 파기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김 총리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며 내일 기자회견을 열어 총리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새벽 1시에 관저로 김 전 대통령께 전화를 걸어 사정이 급박하다며 아침에 김 총리와 박태준 자민련 총재 세 분이 조찬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세 분이 조찬회동을 통해 고비를 넘겼다. 김 총리의 기자회견도 취소됐다.”

― 여권 등 정치권에서 협치 얘기가 나오고 있다.

“협치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이쪽 안과 저쪽 안을 내놓고 격의 없이 얘기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장관 한두 명이 입각한다고 해서 협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정치권은 어떤가.

“여당이 일사불란해도 끌고 가기 어려운데 친문(친문재인), 친박(친박근혜), 친이(친이명박)가 나오면 힘이 분산된다.”

―공군 법무관 때 기억에 남는 일은.

“검찰과장을 하며 실미도 ‘684 특수부대’ 사건을 조사하고 재판을 진행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 대응부대로 무인도인 실미도에 특수부대가 창설됐다. 1968년 4월에 창설돼 ‘684 특공대’로 불렸다.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만든 부대였다. 부대원이 모두 사형수가 아니다. 깡패 등 전과자도 있었지만 전과가 없는 부대원도 있는 등 구성원이 다양했다. 계속된 고강도 훈련과 열악한 복지로 불만이 쌓였던 차에 부대원 3명이 인근 섬에 들어가 초등학교 여교사를 겁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휘관이 부대원들 앞에서 사고를 낸 3명을 총살해 그 자리에서 화장을 한 후 뼈를 추려 서해에 뿌렸다. 이에 격분한 부대원들이 기간장교를 다 죽이고 무장한 채 인천에 상륙해 버스를 탈취했다. 이들이 서울로 오다가 영등포 로터리에서 전주를 들이받았고, 소지한 폭탄이 터져 4명만 살고 나머지는 사망했다. 생존자 4명은 사형됐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 김중권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은… 

△경북 울진(1939) △후포고, 고려대 법대 졸, 서울대 사법대학원 수료, 감리교 신학대 대학원 졸, 법학박사, 명예 정치학박사 △사법시험 합격(8회) 군법무관, 청주지법 판사, 서울지법 수원지원·영등포지원 판사, 대구지법 영덕지원장, 대구지법·서울고법 판사 △11,12,13대 국회의원 △민정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사무차장 겸 중앙집행위원 △국회 법사위원장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비서관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단국대 교수, 일본 도쿄대 법학부 객원교수 △대만 명전대학 종신영예교수(현) △법무법인 에이스 고문변호사, 법무법인 양헌 고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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