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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가장 듣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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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8-03 23:36:51 수정 : 2018-08-03 23: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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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세요.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입장이 뭔지 얘기해야 하는 상황인 줄 압니까?”

몇 주 전 모 출입처 대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들은 첫 마디다. 현안에 대한 공식 입장을 물어본 것인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비아냥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한가해서 당신에게 전화 건 줄 아느냐”며 치받고 전화를 끊고 싶었다. 하지만 해당 부처의 의견을 들어야만 했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거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남혜정 사회부 기자

기자는 필요하다면 취재원이 불편해하는 질문도 해야 한다. 취재 과정에서 듣는 모진(?) 언사들은 훌훌 털어버리는 게 좋다. 그러나 통화를 끝낸 후에도 한동안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한 지인은 “기자생활이 몇 년차인데 아직도 그런 걸로 스트레스 받느냐”며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의 얘기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사람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임계치는 다르다. 특히 나는 스트레스에 취약한 물고기로 알려진 ‘개복치’와 비슷한 부류다. 같은 상황에 처할 때마다 겉으론 괜찮은 척할 수 있을지 몰라도 속으론 정말 괜찮지 않을 것이다.

피서를 겸해 들른 서점에서 유사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계산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손에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이 들려 있었다.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증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진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와의 대화를 엮은 에세이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후원을 받아 스스로 만든 책이었으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면서 정식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밖에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행복해지는 연습을 해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위로를 건네는 자전적 에세이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글귀를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모여 있었다.

이 같은 에세이 열풍은 그만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보건복지부의 ‘2016년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4명 중 1명은 평생 한 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했으며 61만3000명(전체 국민 1.5%)이 우울증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19세 이상 남녀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불행하다’는 답변이 73.4%나 됐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저자는 서문에서 “나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속은 곪아 있는 애매한 사람들이 궁금하다. 세상은 아주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아무쪼록 ‘나만 그런 게 아니었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네’라는 감상이 남는 책이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독자들은 “더 노력해”, “아직도 부족해”라는 채찍보다 “너도 이렇게 힘들었구나”,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괜찮아”라는 위로와 공감의 목소리를 책에서 찾는다. 몸매, 학벌, 재력 등 외적인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풍토 속에서 남들의 기대치에 맞추는 삶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고자 하는 움직임 아닐까.

사실 지인에게 듣고 싶었던 말도 “나도 그래. 쉽게 상처받는 개복치 같은 너의 모습도 괜찮아”라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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